‘바이플레이션’과 통화정책
“중앙은행이 할 일은 파티가 한창일 때 펀치볼(Punch bowl)을 치우는 것이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 의장을 지낸 윌리엄 마틴은 중앙은행의 역할을 이렇게 설명했다. 펀치볼은 과일주스나 칵테일 등을 담는 대형 음료 그릇이다. 파티장에서 펀치볼을 치우는 것은 곧 파티가 끝날 테니 집에 갈 준비를 하라는 신호다. 중앙은행의 역할도 이와 마찬가지다. 경기가 활황일 때 너무 과열되지 않도록 기준금리를 올려 돈줄을 죄어야 한다. 이제 그만 경기 활황의 취기에서 벗어나 긴축 경기에 대비하라는 신호를 보내야 한다. 그래야 각 경제주체들이 무리한 투자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 동시 발생 우려
최근 차기 한국은행 총재로 지명된 이창용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태평양담당 국장은 “성장, 물가, 금융안정을 어떻게 균형 있게 고려하면서 통화정책을 운영해 나갈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할 것”이라는 소감을 밝혔다. 그는 “치열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미 연준의 통화정책 정상화 속도가 빨라지는 가운데 중국 내 오미크론 변이 확산으로 중국 경제 둔화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어 국내외 경제에 미치는 파장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이처럼 대외 여건의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국내 인플레이션과 경기 리스크가 동시에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지금은 펀치볼을 치워야 할 때가 맞긴 한데 자칫 파티의 흥을 완전히 깨버릴까 걱정이 된다’인 것 같다. 인플레이션(물가 상승)과 디플레이션(물가 하락)이 동시에 발생하는 ‘바이플레이션(Biflation)’의 발생 가능성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세계는 지금 코로나19 대유행에 따른 글로벌 공급망 붕괴에다 2월 24일 시작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으로 촉발된 에너지 및 원자재 가격 상승이 겹쳐 강한 인플레이션 압박을 받고 있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두 나라의 에너지와 곡물의 생산 및 공급에 차질을 일으키고 있다. 이로 인해 이들 품목의 공급을 두 나라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는 유럽은 물론 아프리카, 중동, 남미 등 다른 지역도 고물가의 고통을 겪고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한국금융연구원에 따르면 2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전년 동월대비 3.7%로 2021년 하반기 이후 높은 상승세가 이어지고 있다. 휘발유 가격이 전년 동월에 비해 16.5%, 경유 가격이 21.0% 급등하고 공업 제품 가격이 5.2% 상승한 탓이다. 그런데 이 지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영향이 아직 반영되지 않은 것이다. 만약 전쟁의 장기화로 원자재 가격이 불안한 흐름을 지속한다면 소비자 물가는 하반기에 더 오를 수 있다.
주요 선진국들 금리 인상 기조 유지
중국발 디플레이션 우려는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의 대응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중국 정부가 오미크론 변이 확산에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대응하면서 경제 수도인 상하이를 비롯해 주요 도시가 잇달아 봉쇄되고 있다. 이로 인해 글로벌 기업들에 주요 부품을 공급하는 공장들의 가동이 중단되거나 조업량이 크게 줄면서 중국 경기의 둔화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 모두 정책적으로 대응하기가 결코 만만찮다. 두 현상이 중첩되는 바이플레이션은 더욱 어렵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들은 금리 인상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당장은 인플레이션 압력이 더 강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미 연준은 3월 중순에 정책금리를 기존 0~0.25%에서 0.25~0.5%로 0.25%포인트 인상했다. 연준은 2022년 안에 총 7회, 2023년에는 최소 3회 금리를 올릴 것을 예고하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3월 10일 회의에서 정책금리는 동결했지만 자산매입 규모는 점차 축소해 유동성 규모를 줄여나가기로 했다. 하지만 각국 중앙은행이 펀치볼을 너무 오랜 기간 치워두는 어리석은 결정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도 나온다. 과도한 금리 인상은 실업률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3월 24일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연준이 실업률 증가 없이 인플레이션을 잡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생각”이라고 지적했다.
이춘재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