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형, ‘Garden Blue’, 면 위에 혼합재료, 700×411cm, 2013
*氣韻生動·뛰어난 예술품에 대해 이르는 말
어릴 때 조그만 마당이 딸린 주택에서 살았다. 지금은 아파트에서 산다. 아파트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보편적인 주거형태로 자리 잡은 지 오래. 서울과 수도권은 물론 웬만한 지방 중소도시에도 고층 아파트가 우후죽순 솟아오르고 있다. 아파트에선 계절 상관없이 언제나 반팔 옷 차림이다. 그만큼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다.
하지만 아파트 때문에 잃은 것도 많다. 대문과 골목이 대표적이다. 대문은 현관문으로 바뀌었다. 골목은 엘리베이터가 대신한다. 마당도 그렇다. 아파트 단지 내 공원이 마당 역할을 한다. 우리는 아파트라는 서구적이고 인공적인 주거공간에서 편리함을 얻었다. 대신 자연으로부터는 한층 멀어진 삶을 살고 있다.
‘자연’은 ‘인간’과 함께 예술에서 아주 오래된 주제이자 영원한 테마다. 거칠게 구분하면 인간에 대한 관심은 서양(예술)에서, 반대로 자연에 대한 관심은 동양(예술)에서 두드러진다. 서양은 인간을 자연과 분리돼 독립된 존재로 인식한다. 따라서 자연을 극복의 대상으로 여긴다.
반면 동양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생각한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 어울리고 공존하는 관계로 파악한다. 서양미술사를 보면 대체로 초상·인물화가 발달했고 동양미술사에선 산수화(山水畵)가 많이 그려졌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선형, ‘Garden Blue’, 면 위에 혼합재료, 210×130cm, 2020
전통과 현대, 구상과 추상 사이서 찾은 돌파구
이런 측면에서 보면 화가 김선형의 작품은 생각할 구석이 많은 그림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의 그림엔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마음이 담겨있다. 동양화를 전공한 화가가 체험한 자연에 대한 풍부한 정서가 표현돼 있다.
김선형의 푸른색 그림은 전통 수묵화에서 출발해 그것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동시에 독창적인 세계를 확립한 현대적인 추상회화다. 김선형은 먹(墨) 대신 푸른색 물감을 사용한다. 이런 색채에 상응해서 모든 작품의 제목을 ‘Garden Blue’, 즉 ‘푸른색 정원’이라고 붙였다.
조선시대 청화백자에 그려진 푸른색 안료가 연상된다.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운 푸른색 점과 선은 대상의 재현을 거부한다. 화가의 격렬한 몸짓과 거친 숨결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이렇게 해서 생긴 붓 자국과 물감의 번짐은 추상표현주의 회화처럼 자유분방하다. 우연성과 즉흥성에서 발현된 몸짓의 흔적이다.
꽃문양과 식물 형상이 그림의 모티프다. 이 역시 조선시대 민화에서 발견되는 탈(脫)형식의 경지를 보여준다. 사대부 문인화가가 즐겨 그린 사군자에 버금가는 문기(文氣)가 충만하다. 특히 그가 다루는 푸른색은 과거의 전통과 권위를 상징하는 먹이 지닌 굴레에서 벋어나기 위한 과감한 시도의 결과물이다.
1980~1990년대 우리 현대미술사, 특히 동양화단에서 발현했던 중요한 경향으로 ‘수묵화 운동’을 빼놓을 수 없다. 그 중심인물이 남천 송수남(1938~2013) 선생이다. 그리고 남천이 각별히 아꼈던 제자 중 한 명이 바로 김선형이다. 내리사랑 못지않게 스승 남천에 대한 존경 역시 애틋하다. 사실적 묘사에서 벗어난 서정적 추상을 추구하게 된 계기도 온전히 스승의 가르침에서 찾는 김선형이다.
그는 “수묵정신과 물성적 특성을 유지하면서 색채의 변화를 시도하고 화면의 확장성을 추구하는 경향은 모두 남천 선생으로부터 시작됐다”고 말한다. 이런 경우를 두고 청출어람의 본보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선형, ‘부귀청화’, 한지 위에 혼합재료, 60×35cm, 2016
새로운 경지의 그림이 기대되는 시간
김선형은 1963년생, 이제 곧 환갑이다. 그러나 여전히 젊은, 중견 화가다. 서울 휘문고와 홍익대 동양화과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른 살 어린(?) 나이에 경인교대 교수가 됐다. 생활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자칫하면 안주할 수 있는 여건이었기에 더 긴장하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 결과가 70여 회에 육박하는 개인전이다. 1988년 첫 개인전 이후 최근까지 매해, 1년에 두세 차례 빠짐없이 개인전을 연 셈이다. 그만큼 작업량이 많다는 얘기다. 엄청난 열정과 확고한 의지 없이는 불가능한 성과다.
지난 40여 년을 쉬지 않고 달려온 그가 이젠 호흡을 가다듬는다. 앞으로 전시회를 좀 줄일 계획이란다. 그동안 멀리서 크고 넓은 시선으로 자연을 바라봤다. 그 감흥을 원없이 맘껏 화면에 옮겼다. 이제는 가던 길 멈추고 쪼그리고 앉아서 발밑에 핀 꽃과 이름 모를 풀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사유하겠단다. 새로운 경지의 김선형 그림이 기대되는 시간이다. 푸른색은 여전할까?
이준희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겸임교수_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창작에서 전향해 몇 년간 큐레이터로 일했고, 미술 전문지 <월간미술>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까지 맡아 18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것보다 여전히 아티스트에 가까운 ‘미술인’으로 불리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