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테 피나코테크 전경│©Rufus46·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뮌헨은 독일에서 가장 큰 바이에른주의 주도(州都)다. 인구 145만여 명으로 베를린과 함부르크에 이은 독일 제3의 도시다. 유서 깊은 바로크, 로코코 양식의 건축물이 즐비한 문화의 도시며 박물관의 도시, 광장의 도시, 공원의 도시, 문학의 도시, 맥주의 도시로 잘 알려져 있다. 뛰어난 문화 수준과 쾌적하고 안전한 환경, 고풍스러운 분위기, 금융경제의 중심지로 소득수준이 높아 독일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도시로 꼽히고 있다.
뮌헨의 기원은 베네딕토 수도회 시절인 8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나 도시로서 윤곽을 드러낸 것은 1157년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3세(1129년경~1195)에 의해서였다. 1255년 비텔스바흐 가문의 본거지로 낙점받아 영향력을 확장한 뮌헨은 1506년에 수립된 바이에른 통일왕국과 1806년에 출범해 1918년에 막을 내린 바이에른 신왕국 시대 400년 동안 바이에른 왕국의 수도로 위세를 떨쳤다. 비텔스바흐 가문은 1180년부터 1918년까지 700년 넘게 바이에른을 통치한 독일의 귀족 가문이다.
16세기 독일 르네상스 전성기를 이끈 거점 도시였던 뮌헨에 이 무렵 세계 최대 규모의 맥주 축제인 옥토버페스트로 유명한 호프브로이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1589년이었다. 옥토버페스트는 매년 9월 하순에서 10월 초순까지 2주간 열린다.
▶페테르 브뤼헐, ‘게으름뱅이의 천국’, 패널에 유화, 52×78cm, 1567
문화유산 즐비한 바이에른 왕국 수도 뮌헨
바이에른 왕국의 수도라는 명성에 어울리게 뮌헨 곳곳에는 찬란한 궁정문화를 꽃피운 역사적인 궁전이 여럿 남아 있다. 20세기 초까지 비텔스바흐 가문의 여름 별궁이었던 님펜부르크 궁전이 대표적이다. 1664년 바이에른의 선제후 페르디난트 마리아(1636~1679)가 아들인 막시밀리안 2세(1662~1726)의 출생을 기념해 건립한 5층 규모의 저택이 시초다.
이후 18세기 초 막시밀리안 2세가 저택 주위로 부속건물인 파빌리온을 새로 짓는 등 1784년까지 계속된 증축 과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후기 바로크 양식과 로코코 양식의 정수로 불리는 님펜부르크 궁전은 유럽의 궁전 중에서도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다. 궁전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요정의 신 ‘님프’에서 차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텔스바흐 가문의 본궁은 레지덴츠 궁전으로 역시 뮌헨에 있다.
뮌헨에는 바이에른 왕국과 비텔스바흐 가문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예술 구역 또는 예술 특구로 불리는 쿤스트아레알도 그중 하나다. 쿤스트아레알은 미술관과 박물관이 모여있는 뮌헨의 대표적인 예술의 거리다. 700년 이상 바이에른의 맹주로 군림한 비텔스바흐 왕조의 탁월한 예술적 안목이 빚어낸 성취를 확인할 수 있는 장소가 쿤스트아레알이다.
10여 개의 미술관·박물관들이 들어서 있는 쿤스트아레알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피나코테크 트리오다. 피나코테크는 그리스어로 회화 수집관이라는 뜻인데 14~18세기 회화를 볼 수 있는 알테 피나코테크(고전 회화관)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회화가 중심을 이루는 노이에 피나코테크(근대 회화관), 20세기 이후 현대미술 작품을 컬렉션으로 한 피나코테크 데어 모데른(현대 회화관) 세 군데가 쿤스트아레알을 대표하는 미술관이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 ‘레우키포스 딸들의 납치’, 캔버스에 유화, 224×210.5cm, 1618년경│©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거장들 작품 대거 보유한 독일 최대 미술관
피나코테크 3총사 중에서도 알테 피나코테크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로코코 시대를 빛낸 거장들의 작품을 대거 보유하고 있는 독일 최대 규모의 미술관이자 바이에른 왕조의 영화를 간직한 명소다. 피나코테크 외에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조각 작품 전시장인 글립토테크 미술관, 칸딘스키(1866~1944)와 프란츠 마르크(1880~1916)가 1911년~1914년 사이에 주도한 독일 표현주의 미술사조 청기사파 작품으로 유명한 렌바흐하우스, 유럽에서 앤디 워홀(1928~1987)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브란트호스트 미술관, 국립 고미술박물관, 국립 그래픽아트 전시관 등이 있다.
1506년 바이에른 통일왕국 출범 이후 뮌헨은 정치·경제의 중심지로 급부상하면서 400년 동안 왕국의 수도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바이에른 신왕국 시절, 뮌헨은 한 인물에 의해 근대도시로 탈바꿈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지니게 됐는데 그가 바로 루트비히 1세 국왕(1786~1868, 재위 1825~1848)이다.
20년 넘게 바이에른 왕국을 통치한 그는 예술과 건축에 남다른 애정을 쏟은 문화 국왕이었다. 예술가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한 강력한 후원자이자 뛰어난 심미안을 지닌 컬렉터로서 뮌헨을 예술의 도시, 문화유산의 도시로 만드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바이에른 신왕국의 초대 국왕 막시밀리안 1세(1756~1825, 재위 1806~1825)의 아들인 루트비히 1세는 1825년 부친의 사망으로 왕위를 물려받은 뒤 뮌헨을 근대도시로 바꾸고자 대대적인 정비사업을 펼쳐나갔다. 뮌헨의 명소로 자리 잡은 기념비적인 건물 다수가 이때 건축됐다.
뮌헨 예술의 심장 알테 피나코테크와 노이에 피나코테크, 글립토테크 미술관도 루트비히 1세의 문화예술진흥 정책에 따라 세워졌다. 왕세자 시절부터 미술품 수집에 관심이 많았던 루트비히 1세는 국왕에 오른 뒤 자신의 소장품을 비롯해 300년 이상 계속된 가문의 컬렉션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관리하기 위해 미술관을 건립하기로 한 것이다.
▶비텔스바흐 가문의 별궁으로 사용됐던 님펜부르크 궁전 전경│©Richard Bartz, Munich aka Makro·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프랑수아 부셰, ‘마담 퐁파두르 초상’, 캔버스에 유화, 212×164cm, 1756
14~18세기 유럽 회화의 정수 한 눈에 감상
바이에른 신왕국의 국왕에 등극한 이듬해인 1826년, 루트비히 1세는 당대의 건축가 레오 폰 클렌체(1784~1864)에게 특명을 내렸다. 알테 피나코테크가 잉태되는 순간이었다. 수 세기 동안 선대의 왕실에서 수집한 미술품을 전시하기 위한 미술관 공사는 10년 동안 계속됐고 1836년 10월 르네상스양식의 2층 건물이 완성됐다.
루트비히 1세는 재위 기간 때 공을 들인 컬렉션을 빛낼 노이에 피나코테크 건설도 지시했는데 왕위에서 물러난 지 5년이 지난 1853년에 개관했다. 노이에 피나코테크는 2차 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무너져 1981년 현대식 건물로 재건축됐다. 그리스·로마 시대 조각 작품 전용 미술관인 글립토테크도 국왕 시절인 1830년에 완공됐다.
알테 피나코테크는 세계 최고 수준인 독일 르네상스 회화컬렉션을 중심으로 플랑드르, 이탈리아, 프랑스 등 14~18세기 유럽 회화의 정수를 감상할 수 있는 고전 회화 미술관이다. 크고 작은 60여 개의 전시실에 7000여 점의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반파됐으나 1952~1957년 대대적인 복구공사 끝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 라파엘로(1483~1520), 페테르 브뤼헐(1525~1569), 렘브란트(1606~1669), 엘 그레코(1541~1614), 얀 반 에이크(1395년경~1441), 페테르 파울 루벤스(1577~1640), 프랑수아 부셰(1703~1770)….
알테 피나코테크 컬렉션은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대가들의 작품으로 가득하다. 특히 15세기 독일 미술의 잠재력을 유럽 전역에 알린 화가 겸 판화가이자 이론가로 맹활약한 뒤러는 알테 피나코테크가 첫 손에 꼽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뒤러는 단지 독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알테 피나코테크의 귀빈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다. 15세기에 감히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허용되는 정면 자화상을 시도해 자화상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데다 판화와 인쇄술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최초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서양미술사에 불멸의 업적을 남긴 거장으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알브레히트 뒤러,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 라임 나무에 유화, 67.1×48.9cm, 1500
▶알브레히트 뒤러의 서명│©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자화상의 선구자 뒤러 작품 대표 컬렉션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은 자화상의 새 시대를 연 뒤러의 대표작이자 알테 피나코테크의 마스코트 같은 작품이다. 치렁치렁한 긴 머리, 값비싼 모피 코트, 예수를 연상케 하는 생김새, 예수가 축복의 기도를 할 때 볼 수 있는 오른손의 움직임, 사진보다 더 사실적으로 보이는 머리카락과 수염 묘사, 왼쪽 상단부에 금박으로 아로새긴 모노그램(사람 이름의 머리글자를 도안화한 결합문자) 서명과 오른쪽으로 대칭을 이루는 자리에 네 줄로 쓰인 금박 문장 등 하나같이 뒤러의 무한한 자존감을 시사하는 상징이다.
600년 전에 작품의 독창성(오리지날리티)을 보증하는 모노그램 방식의 서명을 고안했다니 경이로운 자의식의 발로이자 압도적인 브랜드 마케팅이다. 네 줄 문장에서 뒤러는 그림처럼 자신도 영원불변의 고귀한 존재임을 당당하게 선언하고 있다.
‘나, 뉘른베르크 출신의 알브레히트 뒤러는 29세 때 불변의 물감으로 나 자신을 그렸노라.’
박인권 문화 칼럼니스트_ PIK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전 <스포츠서울> 문화레저부 부장과 한국사립미술관협회 팀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와 사랑에 빠진 그림> <미술전시 홍보, 이렇게 한다>, 미술 연구용역 보고서 ‘미술관 건립·운영 매뉴얼’ ‘미술관 마케팅 백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