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대재앙 때 꽃피울 ‘생명의 씨앗’ 미래 세대 위한 현대판 ‘노아의 방주’

2022.04.25 최신호 보기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일원에 조성된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안의 ‘시드볼트’ 모습│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백두대간수목원 ‘종자 저장고’를 가다
강원도 영월에서 내리계곡 물길을 따라 태백산·소백산 백두대간 기슭을 타고 굽이굽이 고개를 넘어서면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해발 600m 고지에 들어선다. 총 5179ha(1500만 평)에 걸쳐 조성된 국립백두대간수목원(2018년 정식 개관)이 눈앞에 펼쳐진다. 수목원 전체 구역은 크게 생태탐방지구(4973ha)와 중점조성지역(206ha)으로 나뉜다. 식목일인 4월 5일, 군데군데 노란 산수유꽃이 활짝 핀 수목원에 봄철 관람객 몇몇이 드문드문 걷고 있었다. 백두대간 깊은 산속에 있지만 코로나19 이전에는 연간 20만 명가량 방문한 수목원이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는 백두대간의 상징적 동물인 호랑이가 서식하는 숲을 재현한 호랑이숲이 있다. 4월 15일 개장한 이 호랑이숲에는 멸종위기에 처한 백두산(시베리아) 호랑이 여섯 마리가 자연방사형으로 살고 있다. 이 수목원에만 있는 또 다른 특징은 이른바 현대판 ‘노아의 방주’로 불리는 종자 영구 저장·보존시설 ‘시드볼트’다. 종자를 뜻하는 ‘시드(Seed)’와 금고를 뜻하는 ‘볼트(Vault)’의 합성어인 시드볼트는 직역하면 ‘종자를 보관하는 금고’다.
2022년 4월 1일은 ‘제2회 멸종위기종의 날’이다. 멸종위기종의 날은 정부가 1987년 4월 1일 ‘멸종위기야생생물’을 지정했던 날을 기념하고 멸종위기종의 보전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2021년에 처음 선포했다. 1987년은 당시 ‘환경보전법’에 멸종위기에 처한 특정야생동식물(이후 멸종위기야생생물로 명칭 변경)을 지정해 종자 보전에 나서기 시작한 해다. 그로부터 30년 뒤 2017년 이곳 봉화군 백두대간 기슭에 시드볼트(2011년 11월~2015년 12월 조성)가 정식으로 들어섰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방문자센터│조계완 기자

전 세계 유일의 야생식물 종자 저장고
수목원 정문 방문자센터에서 시작해 각종 주제정원 구간을 둘러보며 문수산 중턱으로 2km가량 오르다 보면 산림환경연구동 아래로 식물 종자(씨앗)를 형상화한 시드볼트 전시관이 한눈에 보인다. 시드볼트는 지하 수십 미터 깊이에 3중 철판 구조로 이뤄졌다. 영하 20℃에 200만 점의 야생식물 종자를 영구 저장·보존할 수 있다.
“현재 13만 점가량 영구 보관 중입니다. 야생식물(산이나 들에서 저절로 나서 자라는 식물) 종자를 보관하는 저장고로는 여기가 전 세계에서 유일한 곳입니다. 지하 보관시설은 두 곳으로 지하 1터널과 2터널이 있습니다.”
이날 산림환경연구동에서 만난 배기화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시드볼트운영센터장(농학박사)의 설명이다.
배기화 센터장은 “전 세계에서 시드볼트는 단 두 곳이 있는데 노르웨이의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 시드볼트(2007년 조성)는 식용식물 종자 위주로 보존하고 있는 반면, 백두대간수목원 시드볼트는 섬유·주택·재료 등 인간의 모든 의식주 생활 영역에 쓰이는 식물 종자를 전부 보관한다. 특히 야생식물 종자 위주로 보존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르웨이의 북극 영구동토층인 스발바르제도 스피츠베르겐섬에 있는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지하 120m의 폐광을 활용한 터널)는 핵전쟁, 소행성 충돌, 기상이변 등 지구적 규모의 재앙 후에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생존할 수 있도록 식량 씨앗을 저장하기 위해 세계 각국의 작물유전자은행(시드뱅크)이 갖고 있는 종자들의 복제 표본 또는 여유본을 저장하고 있다.
우리 시드볼트는 지하터널형으로 깊이 40m, 길이 127m에 저장고 2개 동으로 가동 중이다. 저장고 내부는 외부 온도 등 기후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항온 항습을 유지하도록 설계됐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시드볼트도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야생식물 종자를 영구 보존하는 ‘글로벌 시드볼트’다. 배 센터장은 “자생력을 잃어가는 산림식물뿐만 아니라 기후변화나 전쟁, 핵폭발 등 지구 차원의 대재앙에 대비해 야생식물 멸종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전 세계 생물다양성을 보전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시설이다. 물론 전 세계 야생식물 종자를 수탁받아 무상으로 안전하게 보존한다.
“6·25전쟁과 경제발전 과정에서 우리나라를 도와준 전 세계에 우리도 인류를 위해 무언가 역할을 해보자고 산림청 공무원들이 고민한 끝에 글로벌 시드볼트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국회에서 지금 기존 수목원정원법 안에 시드볼트 관련 내용을 별도 조항으로 명문화해 해외 야생 종자를 보관·저장하는 일을 범국가 차원으로 확대하고 제도화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과 유한킴벌리가 2021년 11월 15일 전국 구상나무 종자 ‘시드볼트’ 영구저장 협약을 맺었다.

한반도 희귀·특산식물 1만 6749점 저장
현재 저장 중인 종자 13만여 점은 국립수목원, 천리포수목원, 고려대학교, 안동대학교, 정선군 동강할미꽃보존회 등 여러 국내외 수목원과 연구기관에서 중복 보존용 종자를 기탁받았거나 수목원이 자체 수집·확보한 종자들이다.
수목원 생물자원조사팀은 백두대간을 설악산부터 지리산까지 총 5개 권역으로 나눈 뒤 권역별로 흩어져 누비고 다니면서 전반적인 식물 분포를 조사하고 야생식물 종자를 수집한다. 꽃이 개화했을 때를 중심으로 식물의 종을 파악하고 수집할 만한 종이라고 판단하면 그곳의 좌표를 기록하고 띠를 묶어 표식해둔 뒤 그 종자가 결실을 맺고 성숙할 때까지 기다린다.
열매가 가장 잘 익었을 때 종자를 수집하는 것이 원칙이므로 수집하려면 같은 장소를 적어도 세 번은 가야 한다. 처음 꽃이 필 때 식물종을 파악한 뒤에 식물체 표본을 수집하기 위해 한 번, 종자가 잘 맺혔는지 확인하기 위해 한 번, 최종적으로 종자를 수집하기 위해 또 한 번 가야 한다.
한반도 희귀·특산식물로만 보면 2021년 말 기준으로 총 601종에 걸쳐 1만 6749점을 저장하고 있다. 우리나라 전체 희귀식물, 특산식물, 희귀·특산식물종에서 51.7~83.7%를 보관 중이다. 개인도 종자를 기탁할 수 있지만 아직은 극소수이고 대다수 종자 기탁자는 수목·종자 관련 기관들이다. 전국 공사립 수목원 50여 곳 중 절반가량이 시드볼트에 종자를 기탁·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노르웨이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에 보관 중인 종자는 주로 농작물 종자 약 72만 점(2015년 기준)이다. 산림의 야생식물 종자 200만 점 중복 보존이 완수되면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시드볼트는 전 세계에서 독보적인 야생식물 종자저장시설이 된다. 노르웨이 시드볼트와는 우리 종자 몇 종을 보내고 그쪽에서 다른 종을 받기로 협약을 맺기도 했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안의 ‘시드볼트’ 내부 모습. 유리병에 종자가 영구저장·보관되고 있다.│국립백두대간수목원

기후변화·전쟁 등 대비한 ‘인류 금고’
수목원은 2021년부터 블랙박스 저장시스템을 도입해 안전 보관뿐만 아니라 종자의 소유권이 기탁자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시트볼트에 저장된 종자의 권리는 오로지 기탁자에게만 주어진다. 즉 기탁자의 동의 없이는 종자를 절대로 활용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기탁자가 종자를 블랙박스에 밀봉해 보내면 박스를 개봉하지 않고 그대로 시드볼트에 영구 저장합니다. 종자 유출을 막고 내구성도 고려해 규격화된 블랙박스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물론 특별한 예외 사유가 있으면 종자를 꺼내달라고 기탁자가 요청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특정 지역에만 서식하는 식물 종자인데 그 지역에 산불로 종자가 완전 소실된 경우 복원을 위해 종자를 반출해 제공할 수 있는 것이죠.”(배 센터장)
시드볼트는 일종의 종자보험으로 야생식물 자생지가 파괴될 경우 이곳에 저장해둔 종자로 복원할 수 있는 것이다.
시드볼트와 시드뱅크는 어떻게 다를까? 둘 다 종자를 저장하기 위한 시설이지만 저장 목적과 기간에 차이가 있다. 시드볼트는 기후변화나 전쟁, 핵폭발 등 예기치 못한 지구 차원의 대재앙에 대비해 야생식물의 멸종을 막는 목적이 있고 종자 보관 기간은 영구적이다. 반면 시드뱅크는 일반적으로 연구·실험(의약품이나 화장품 활용 성분 추출)이나 증식을 목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중·단기적으로 종자를 저장하는 시설이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시드볼트뿐만 아니라 산림환경연구동에서 종자의 형태 분석, 활력 검정, 생리 연구 등 조사·수집·보존 연구를 수행하는 종합 종자연구·관리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시트볼트에 저장된 종자는 당연히 시간이 흐를수록 생리·생화학적 변화 등으로 활력이 저하돼 수십 년 혹은 100년이 지나도 무사히 싹을 틔울 수 있을지 불확실해진다. 이를 막기 위해 기존 수탁 종자를 일정 주기마다 건강한 종자로 교체·갱신을 권장하고 수목원 연구팀도 종자의 저장 수명을 예측하는 연구를 벌이고 있다.
“우리 특산·희귀 야생식물종들이 기후변화 등으로 위협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종자 보존의 목적과 방향을 식물종 개체를 복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종의 다양한 서식 지역을 복원하는 쪽으로 확대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호랑이라면 호랑이종을 특정한 동식물 보존지역 안에서 유지·보존하는 것보다 호랑이가 서식하고 있는 여러 지역 자체를 같이 복원하는 것이죠.”
특히 야생식물은 지역적 다양성과 유전적 다양성이 있을 수 있다. 같은 구상나무종이라도 가능하면 제주도와 지리산 등 다양한 지역에서 최대한 많이 수집하고 같은 지역에서도 해마다 종자를 수집해야 매해 종자의 활력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

멸종위기종 보존 논의 모임 열 계획
종자를 보관 중인 기관을 포함해 종자를 갖고 있는 누구나 시드볼트에 종자를 맡겨 보관할 수 있다. 공문이나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누리집(종자기탁 신청 페이지), 우편 등으로 신청하면 된다. 접수되면 서류 심사를 거치고 안전하게 담을 규격화된 저장·운송용기(블랙박스)를 보내주기도 한다.
기탁자가 유리병 등 용기에 담아 블랙박스에 넣어 보내면 종자 이력 등 정보를 포함해 블랙박스 검수 과정을 거쳐 정보무늬(QR코드)를 부착하고 산림생물자원관리시스템에 종자 도입번호를 부여·입력해 데이터베이스화한다. 그리고 나서 블랙박스 상태 그대로 지하터널 안으로 입고 작업을 거쳐 저장하고 종자기탁증서를 교부한다.
“최근에 강원도 동해시에 사는 어느 시민이 <시드볼트>(2022년 발간, 출판사 시월)를 읽고 나서 지역의 몇몇 사람들과 동해 지역 멸종위기종에 대해 얘기를 나눈 뒤 시드볼트를 직접 찾아왔습니다. 일종의 멸종위기종 네트워크를 구성해 동해 멸종위기종의 보존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논의하는 모임을 동해시에서 열 계획입니다.”
현재 시드볼트에 영구 보존 중인 종자는 산림청에서 희귀식물로 분류한 종이 대부분이다. 토종 씨앗이나 멸종 위험 등이 있어 보호할 필요성이 있는 보존 가치가 높은 종자가 우선순위로 지정되지만 멸종 위험의 정도를 넘어 점차 전 세계의 모든 ‘야생식물종 일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시드볼트는 국가보안시설이라서 일반인의 출입은 거의 불가능하다.

조계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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