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11월 26일 오전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2019 한·아세안 특별 정상회의에서 아세안 정상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고유환 통일연구원장 인터뷰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미·중·일·러 4강 외교에 머물지 않고 외교의 폭을 확대하는 ‘외교 다변화’를 펼쳤다. 2월 24일 서울 서초구 통일연구원에서 만난 고유환 통일연구원장은 신남방·신북방정책을 활발히 추진하고 중남미·아프리카·중동 국가와 협력을 강화해 미·중 의존도를 낮추고 외교와 경제활동의 지평을 넓힌 점을 다변화 외교의 주요 성과로 꼽았다. 문재인정부가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며 국익의 선택지를 넓혀 다음 정부에서도 큰 흐름은 유지될 것으로 예상했다.
-문재인정부의 외교 다변화 노력은 5년 동안 어떤 성과를 낳았나요?
=‘외교 다변화’의 가장 큰 성과는 신남방정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정부의 균형 외교에서 탈피해 우리의 경제영토, 즉 경제활동의 영역을 넓혔어요. 미·중 간 전략 경쟁이 심화되고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로 중국의 제재를 받으면서 문재인정부는 대중 무역의존도를 줄이려면 아세안과 인도로 가야 한다고 판단한 거죠.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여러 가지 성과를 냈고 무역 비중을 서서히 옮겨가는 기틀을 마련했다고 봅니다.
▶고유환 통일연구원장
-신남방과 교역액이 2021년 사상 최대치(2002억 달러)를 기록했죠. 문재인정부의 외교 다변화는 지난 정부와 어떻게 다른가요?
=과거 냉전시대에 체제에 따른 진영이 형성됐을 때는 외교가 간단했죠. 진영 논리에 따라 외교할 수밖에 없는 ‘진영 외교’ 시대였으니까요. 탈냉전 이후 미·중 간 전략 경쟁 구도로 진전되는 과정에서 전통적 진영 외교에서 ‘균형 외교’로 외교의 초점이 옮겨갔습니다. 그래서 노무현정부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균형자론’이 등장했고 이후 이명박·박근혜정부도 ‘균형적 실용 외교’라고 했어요. 미·중 사이에 균형을 취하는 방식으로 국가이익을 추구하는 관점이죠.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정학적으로는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반도적 위치에 있으면서 군사·안보적으로는 미국과 동맹을 맺고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중국과 상당한 상호 연계성을 갖고 있잖아요. 둘 사이에서 우리의 국익을 찾으려니 결국 균형 논리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죠.
▶문재인 대통령이 2021년 8월 17일 청와대에서 열린 한·카자흐스탄 정상회담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미·중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미·중 간 전략 경쟁이 본격화하기 전에는 균형 외교로 풀어가는 데 큰 문제가 없었어요. 그런데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등장부터 미·중 무역 갈등이 생기고 전략 경쟁의 본질이 확연히 드러나고 경우에 따라 패권 경쟁까지 이어지면서 두 대국이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문제가 생긴 거죠. 일각에서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란 의미로 ‘안미경중’이라는 말도 하지만 사실 말은 쉬워도 불가능한 얘기죠. 미·중 무역 갈등에서도 확인한 거지만 이미 상호의존성이 커져 과거 냉전시대 같은 전략 경쟁은 하기 어렵거든요. 세계적 단위의 노동 분업 등 다양한 가치사슬에서 미·중은 서로 얽혀 있습니다. 미국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자본주의의 위기를 해소하는 방법으로 중국의 값싼 노동력을 활용했는데 시간이 지나며 중국이 미국 패권에 대응할 만큼 성장하니까 구도가 복잡해진 거죠. 이런 상황이니 균형 외교라는 말도 쓰기가 어렵게 됐습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세바스티안 피녜라 칠레 대통령이 2019년 4월 29일 청와대 공식 환영식에서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청와대
-그래서 문재인정부가 외교 다변화를 꾀하게 된 건가요?
=미·중 전략 구도 경쟁이 가속화하면서 이른바 ‘가치 외교’(민주주의·인권의 가치를 외교의 최우선에 두는 외교)라는 게 생겨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미국 유일 패권 체제에서 중국이 부상하면서 미국 단독으로 중국을 견제하기 어려운 구도가 되자 ‘인도·태평양 구상’(미국의 대중 포위망 전략)이나 쿼드(미국·일본·호주·인도 4개국 안보 협의체) 같은 연합전선을 통해 중국을 봉쇄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느냐는 선택의 문제가 생긴 거죠.
어쨌든 특정 나라를 배제하는 블록이나 전선에 함께할 수 없다는 게 지금까지 문재인정부의 기본 입장입니다. ‘전략적 모호성’이라는 말을 대놓고 할 수 없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런 입장(스탠스)을 취하고 있는 거죠. 사실 외교 다변화도 특정 국가나 지역 일변도 외교가 아니라 국익 차원에서 세계를 대상으로 외교한다는 의미라 특별한 이름 붙이기(네이밍)는 아닙니다. 문재인정부는 외교 명칭에 오히려 구속당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굳이 표명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죠.
▶문재인 대통령이 2022년 1월 18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킹 칼리드 국제공항에 도착해 모하메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와 공항 내 접견실에서 환담하고 있다.│한겨레
-외교 명칭을 표명하면 어떤 문제가 있나요?
=정책 당국자들한테 외교 명칭을 왜 안 쓰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런 용어를 쓰는 것 자체가 외교적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우리 국력이 커졌기 때문에 균형이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설명을 들었어요. 미국 외교도 다른 사람들이 가치 외교라는 용어를 붙인 거지, 미국 행정부 자체가 구체적 명칭을 쓰지 않잖아요. 지금 대선후보들도 외교 공약에서 ‘균형’이란 말은 안 쓰죠. 그게 바로 특정 용어를 쓰지 않더라도 국익을 추구하는 데 문제가 없을 정도로 선도국가로 부상한 우리 위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문재인정부 초기만 해도 ‘중견국 외교’라는 표현을 주로 썼었죠.
=중견국에서 선도국가가 됐다는 건 외교적으로 큰 의미가 있어요. 미·중 간 전략 경쟁에서도 크게 휘둘리지 않고 양국 모두에 필요한 나라가 됐다는 의미거든요. 6·25전쟁에 참전했다 휴전한 뒤 70년이 지나 세계 패권을 두고 경쟁하는 두 나라의 발전에 우리가 관계했습니다. 중국은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우리의 기술과 확장식 개발 모델을 가져가 한·중·미 노동 블록으로 연결되며 지금까지 고도성장을 누렸잖아요.
2021년 한미정상회담에서 극적으로 나타난 변화가 그동안 군사 안보 위주였던 한미 동맹이 경제 동맹으로 발전했다는 겁니다. 이런 질적 변화가 생긴 이유는 우리나라가 가치사슬의 우위를 점하는 첨단기술을 갖게 됐다는 거죠. 조선, 철강, 자동차, 반도체 등 주요 산업의 가치사슬에서 거의 정점에 있어요. 경제적으로 우리만큼 양대 국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나라는 없거든요. 정치적으로 어떤 평가를 하든 간에 문재인정부 5년 동안 선도국가라는 이름을 쓸 수 있게 됐고 두 대국과 상당한 상호적 관계를 맺었죠. 문화적으로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등 앞으로 도약할 모든 기반을 갖춘 건 성과라고 봐야죠.
-국제연합무역개발회의(UNCTAD) 설립 이래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진출한 건 우리나라가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2년 연속 초청받는 등 국제적 영향력이 커졌고 선도국가로 자리매김하면서 제3세계 지역에 대한 우리나라의 영향이 커졌습니다.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한 유일한 국가로 개발 모델의 전형이라는 의미가 있으니까요. 특히 중남미 나라들이 우리나라를 상당히 좋게 평가하며 배우려 하고 있고 우리는 자원외교라는 측면에서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요. 저개발국에 희망을 주는 발전 모델로 개발 지원과 함께 우리에게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중남미뿐만 아니라 신북방과 아프리카·중동 지역과도 포괄적 협력관계를 구축했습니다.
=신북방 지역은 정상 방문도 많이 하고 외교적 노력을 많이 했지만 러시아가 지금도 문제가 되는 우크라이나와 크림반도 점용으로 서방의 제재를 받고 있거든요. 제재받는 러시아와 경제협력을 확대할 수 없었고 중앙아시아는 경제적으로 활력이 아주 높은 나라들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신남방보다 실질적 경제 성과가 조금 미흡했다고 보죠.
문재인정부의 성과 가운데 하나가 방위산업 수출입니다. 국방예산을 상당히 늘리면서 방위산업이 발전했어요. 후발 효과라는 게 있다고 그러잖아요. 이전에 좋은 (재래식) 무기를 개발해놓은 나라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는 첨단무기체계로 전환이 쉽지 않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첨단기술을 활용해 핵 이외 다른 무기체계에서는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아랍에미리트(UAE)에 탄도탄 요격미사일 체계 ‘천궁-Ⅱ’를, 호주와 이집트에 K9 자주포를 수출하는 등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면서 외화를 획득한 부분은 의미가 있죠.
-문재인정부의 외교 성과가 다음 정부에 인계돼 일관성을 갖고 추진될 수 있을까요?
=다음 정부는 국익 중심의 균형이든 실용이든 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문재인정부가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면서 나름대로 선택지를 넓혀놓았는데 전략적 명료성을 갖게 되면 선택지가 없는 거죠. 가치 일변도로 가는 게 가능은 한데 과연 국익과 일치할 수 있느냐는 의문입니다.
지금은 국가경계를 넘어 열린 세계라 가치사슬뿐만 아니라 다양한 네트워킹이 생성돼 있는데 국가 간 경계로 선을 그어 서는 외교할 수 없죠. 세계가 하나의 구성체로 한류의 전파도 세계적 단위에서 이뤄지잖아요. 외교 지평도 과거 냉전 시대의 진영 논리적 방식이나 균형 논리 갖고는 안 되는 시대입니다. 큰 흐름은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글 원낙연 기자, 사진 곽윤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