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도 미술관 전경│©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남유럽 국가 스페인은 투우의 나라이자 축구 강국이며 정열과 예술의 나라로 잘 알려져 있다. 20세기 세계미술사를 길이 빛낸 3명의 천재 화가들이 등장하는데 모두 스페인 출신이다. 회화에 상대성원리를 접목한 입체주의를 완성한 파블로 피카소(1881~1973), 꿈과 잠재의식, 상상력의 시각화에 성공한 초현실주의의 마에스트로 살바도르 달리(1904~1989), 추상미술과 초현실주의를 넘나든 환상적이고 순수한 조형 세계를 창시한 화가 겸 조각가 호안 미로(1893~1983)가 그들이다.
두 세기 전에도 스페인이 자랑하는 국보급 화가가 있었다. 18~19세기 스페인 궁정화가로 명성을 떨친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다. 피카소와 달리, 미로, 고야 모두가 흠모해 마지않았던 또 한 명의 선배 화가가 있었는데 바로 17세기 바로크 미술의 거장 벨라스케스(1599~1660)가 그 주인공이다. 벨라스케스는 화가들이 미술 역사상 최고의 화가로 꼽을 만큼 혁신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조형 기법을 창안해낸 것으로 유명하다. 벨라스케스의 천재성은 그를 상징하는 대표작 ‘시녀들’(1656~1657)에서 찬란하게 꽃피웠다.
‘시녀들’에는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펠리페 4세 스페인 국왕(1605~1665, 재위 1621~1665)과 마리아나 왕비, 마르가리타 공주와 시녀들, 집사와 난쟁이, 강아지, 심지어 그림을 그리는 화가 본인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 그림은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작품으로 거론되는데 그 이유는 그림이 고도로 다층적인 구도로 이뤄져 화가의 시선을 가늠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공주를 그린 것인지, 국왕 부처를 그린 것인지, 공주와 국왕 부처를 보고 있는 화가 자신을 그린 것인지, 아니면 이 모든 광경이 벌어지고 있는 작업실 장면을 관람자 시점에서 그린 것인지 도무지 알쏭달쏭할 뿐이다. 미술사적인 가치뿐 아니라 인문사회학적으로도 숱한 논란에 휩싸인 이 그림은 도대체 화가는 무엇을 그렸는가라는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차이에 대한 철학적 화두를 불쑥 던지는 화제작이다.
이 그림은 스페인 미술의 심장 국립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 돼 있다. 프라도 미술관은 전 세계에서 벨라스케스와 고야의 작품을 가장 많이 보유한 미술관이다.
▶2021년 7월 유네스코 선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프라도 미술관 산책로│©Rubén Vique·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세계 최고 수준 벨라스케스·고야 컬렉션
1819년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에서 왕립 미술관으로 개관한 프라도 미술관은 스페인 회화를 중심으로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지역, 독일, 프랑스 등 유럽 미술의 명품 컬렉션으로 소문난 곳이다. 회화 7800여 점, 조각 1000여 점 등 2만 점이 넘는 방대한 소장품을 확보한 가운데 세계 최고 수준의 벨라스케스와 고야 컬렉션으로 유명하다.
프라도 미술관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건립을 위한 첫 삽은 1785년 계몽전제군주 카를로스 3세(1716~1788, 재위 1759~1788)의 명령에 따라 시작됐다. 건물 용도도 회화전용 미술관이 아니라 자연사박물관이었다. 당대 건축의 실력자 후안 데 비야누에바가 설계를 맡아 공사를 진행하던 중 1808년 나폴레옹과 전쟁으로 중단됐다가 손자인 페르난도 7세(1784~1833, 재위 1808, 1813~1833)가 두 번째로 재위하던 1819년 왕실 소장품 중 스페인 회화 300여 점을 내세워 왕립 미술관으로 성격을 변경해 완공했다.
페르난도 7세의 딸인 이사벨 2세(1830~1904, 재위 1833~1868)가 군부 쿠데타로 실권을 상실한 1868년 지금의 국립 프라도 미술관으로 명칭이 확정된 뒤 소장품의 규모도 확장되기 시작했다. 프라도 미술관에 15~17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와 15~16세기 플랑드르 국가 화가들의 소장품이 많은 것은 거의 400년 동안 유럽 왕실 가문을 지배했던 합스부르크가(1438~1806)의 영향 때문이었다. 1700년 스페인 왕실에 대한 친정 체제가 끊기기 전까지 합스부르크가는 자신들이 통치하던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지역 화가들을 스페인으로 파견해 스페인 왕실 미술의 번성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작품 앞에 몰려든 관객들│ ©Benjamín Núñez González·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고대 그리스 3대 건축양식의 완결판
프라도 미술관의 본관인 비야누에바관은 고대 그리스 3대 건축양식을 모두 품은 보기 드문 건축미로도 명성이 자자하다. 세계 유수의 미술관이 궁전을 개조했거나 혁신적인 현대식 설계방식으로 눈길을 끄는 것과 달리 비야누에바관은 장중하고 우아하고 화려한 장식성이 돋보이는 도리스, 이오니아, 코린트 양식으로 통칭하는 고대 그리스 건축기법을 하나의 건물에 집약시킨 걸작 중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정문에서 바라보는 주 출입구는 전형적인 그리스 신전 형태인 장엄하고 중량감이 넘치는 도리스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전시실과 건물 북쪽 방향 출입구는 기품있는 이오니아 양식, 건물 남쪽에 보이는 바깥으로 돌출한 거대한 난간 모양의 발코니는 정교한 장식적 아름다움이 일품인 코린트 양식으로 설계됐다.
20세기 들어 컬렉션이 더욱 풍부해진 프라도 미술관은 폐관된 트리니다드(삼위일체) 미술관과 모데르노(현대) 미술관의 소장품을 흡수하면서 증축을 거듭하던 끝에 2007년 전시 공간의 실질적인 확충을 위해 개축공사를 단행하는데 1996년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스페인 건축가 라파엘 모네오(1937~)가 설계한 일명 헤로니모 건물이다. 미술관 뒤 헤로니모 성당 안마당을 활용해 붉은색 벽돌로 개축한 건물은 튀지 않는 침잠된 분위기가 특징으로 주변 건물과 풍요로운 조화를 꾀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특별전 위주로 운영되며 전시 공간과 사무 공간 외에 강당과 카페, 레스토랑, 세미나실 등의 부대시설로 꾸며져 있다. 본채 건물과는 지하로 연결되도록 설계됐다. 본채와 개축건물 주변으로 벨라스케스와 고야, 스페인의 라파엘로로 불리는 세비야 태생의 17세기 화가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1617~1682)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엘 그레코, ‘목동들의 경배’, 캔버스에 유화, 319×180cm, 1612년~1614년 경
유럽 회화의 주옥같은 작품들 총망라
프라도 미술관의 주요 소장품은 비야누에바관 3개 층에서 상설전 형식으로 공개되고 있다. 가장 먼저 주목할 점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비롯해 고야의 ‘1808년 5월 3일’(1814), 엘 그레코(1541~1614)의 ‘목동들의 경배’(1612년~1614년 경) 등 16~18세기 스페인 미술의 위세를 떨친 3대 화가들의 작품이다.
특히 펠리페 4세 시절 궁정화가로 활동하며 전성기를 구가한 벨라스케스의 500점 가까운 명화들은 프라도 미술관 소장품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대표작 ‘시녀들’을 포함해 ‘브레다 성의 항복’(1635), ‘불카누스의 대장간’(1630년 경), ‘힐란데라’(1656년 경) 등 벨라스케스의 주요 시기별 작품들이 1층에 전시돼 있다.
고야 작품도 회화만 100점이 넘는데 19세기의 문을 연 첫해 가톨릭 국가 스페인을 떠들썩하게 한 ‘옷 벗은 마하’(1800)와 한 짝을 이루는 ‘옷 입은 마하’(1803), 두 작품도 프라도 미술관 소장품이다. 1808년 5월 2일 스페인을 점령한 프랑스군에 항거해 마드리드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키다 다음날 새벽 프랑스군에게 수천 명이 무참하게 처형당하는 만행을 고발한 역사기록화 ‘1808년 5월 3일’도 프라도 미술관이 손에 꼽는 걸작이다.
왜곡된 형태 묘사와 강렬한 색채 구사로 16세기 스페인 미술을 지휘한 엘 그레코의 화풍을 만끽할 수 있는 ‘목동들의 경배’와 ‘수태고지’(1570). ‘그리스도의 세례’(1596~1600), ‘부활’(1596~1600) 등도 1층 전시실에서 볼 수 있다.
또 르네상스 거장 라파엘로(1483~1520)와 보티첼리(1445년 경~1510), 안젤리코(1400년 경~1455), 카라바조(1571년 경~1610), 티치아노(1488년 경~1576), 안드레아 만테냐(1431~1506) 등의 작품도 프라도 미술관에서 눈여겨볼 만한 명화들이다.
이밖에 루벤스(1577~1640), 렘브란트(1606~1669), 플랑드르파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1450년 경~1516), 귀도 레니(1575~1642),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 니콜라 푸생(1594~1665), 앙투안 와토(1684~1721) 등 유럽 회화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망라돼 있다.
▶고야, ‘1808년 5월 3일’, 캔버스에 유화, 266×345cm, 1814│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스페인 내전과 학살 참상 고발한 ‘게르니카’
1936년부터 1939년까지 벌어진 스페인 내전 때 프라도 미술관은 일대 위기에 봉착한다. 인민전선 정부에 맞선 프랑코 장군(1892~1975)이 이끄는 우파 반란군이 마드리드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하자 미술관 측은 발렌시아를 임시 소장처로 정하고 급하게 주요 작품들을 옮긴 뒤 다시 스위스 제네바로 보관 장소를 변경했다. 벨라스케스와 고야, 엘 그레코 세 화가의 작품만 100점이 넘었다. 내전은 1939년 4월 1일 프랑코 장군이 마드리드를 점령하면서 끝났다. 스위스에 안전하게 보관돼 있던 소장품들은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그해 9월 약 3년간의 오랜 도피 생활을 끝내고 미술관으로 되돌아왔다.
한편 프랑코 장군을 지원한 독일군이 1937년 4월 26일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빌바오 북동쪽에 있는 도시인 게르니카를 폭격하자 피카소는 학살의 참상을 고발하는 그림 ‘게르니카’를 그려 그해 6월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출품했다. ‘게르니카’는 1939년 피카소의 뜻에 따라 뉴욕 현대미술관으로 옮겨진 뒤 프랑코가 죽고 6년이 지난 1981년 9월에서야 프라도 미술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게르니카’는 프라도 미술관이 소장 중이던 20세기 이후 모든 작품과 함께 1992년 마드리드에서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인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으로 이관됐다.
박인권 문화 칼럼니스트_ PIK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전 <스포츠서울> 문화레저부 부장과 한국사립미술관협회 팀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와 사랑에 빠진 그림> <미술전시 홍보, 이렇게 한다>, 미술 연구용역 보고서 ‘미술관 건립·운영 매뉴얼’ ‘미술관 마케팅 백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