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에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 정림사지는 백제 사찰을 대표하는 유적지다.
문화재청은 우리 문화재 가치를 널리 알리려고 매년 대표 문화유산을 선정해 홍보한다. 2021년은 김치 만들기, 수원화성, 창덕궁,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칼럼에서 모두 소개한 문화유산이다. '알면 보이고 보이면 사랑하게 되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이미 예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말처럼 잠깐이나마 체험 및 방문을 해본 분들은 분명 그 이전과는 관계의 깊이가 달라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2022년에 선정된 문화유산은 무엇이 있을까?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 개회식에 등장해 이른바 ‘한복공정’ 논란이 불거진 한복이 우선 눈에 띈다. 그리고 경복궁과 팔만대장경, 백제역사유적지구, 조선왕조 궁중음식과 떡이다. 다른 문화유산은 친숙할 듯 싶어 이번엔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여행을 떠나보려고 한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삼국시대 중서부에 자리 잡은 백제는 기원전 18년 고구려와 신라에 앞서 가장 먼저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 뒤로 660년 멸망할 때까지 700년 가까이 존속한 국가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백제의 옛 수도가 머물렀던 세 개 도시(충남 공주시·부여군, 전북 익산시)에 남아 있는 유적지 여덟 곳으로 이뤄져 있다.
시기로는 백제가 이웃 지역과 잦은 교류로 최고의 문화적 전성기를 누렸던 백제 후기(475~660년)에 형성됐다. 공주시에는 공산성, 공주 무령왕릉(송산리 고분군), 부여군에는 관북리 유적 및 부소산성, 정림사지, 부여 왕릉원(능산리 고분군), 나성, 마지막으로 익산시에는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다.
2015년 백제역사유적지구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올린 유네스코는 “백제역사유적은 중국의 도시계획 원칙, 건축 기술, 예술, 종교를 수용해 백제화한 증거를 보여주며 이런 발전을 통해 이룩한 세련된 백제의 문화를 일본 및 동아시아로 전파한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지금은 야경으로 유명한 공주 대표 명소 공산성은 백제의 두 번째 왕궁이 자리 잡은 도시인 웅진(공주)을 지킨 왕성이다. 공산성은 백제가 중국·일본과 문화 교류로 토목 및 건축 기술을 발전시킨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유적이다. 공주 무령왕릉은 백제 무령왕과 왕비의 능으로 삼국시대 왕릉 가운데 처음으로 무덤 주인이 밝혀진 곳이다.
공주에서 이제 부여로 넘어가 보자. 관북리 유적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부소산성은 백제의 세 번째 수도인 사비(부여)의 도성이었다. 백마강을 끼고 백제 왕궁의 배후 산성 역할을 했던 부소산성에서는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패퇴한 소식을 듣고 삼천궁녀가 백마강으로 투신했다는 낙화암도 볼 수 있다.
▶전북 익산 미륵사지에 복원된 서쪽 탑과 동쪽 탑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백제세계유산센터
백제 문화재의 백미 정림사지 오층석탑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 고려시대 학자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백제문화를 서술한 문장이다.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이다. 세련되면서도 절제의 미를 겸비한 백제문화의 핵심을 여덟 글자로 절묘하게 담아냈다고 할 수 있다. 이 표현에 가장 잘 들어맞는 백제의 문화재를 꼽으라면 아마도 정림사지 오층석탑일 거다. 부여에 있는 정림사지는 백제의 대표 사찰인데 바로 이곳에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 석탑인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자리잡고 있다.
백제의 수도 방어 시설로 6㎞에 이르는 나성, 왕과 왕족의 무덤인 부여 왕릉원을 거쳐 백제역사유적지구의 마지막 도시인 익산으로 건너가 보자. 익산에는 ‘왕궁면 왕궁리’라는 지명이 있다. 바로 백제 무왕 때 궁궐터가 조성된 왕궁리 유적이다. 지명 자체가 왕궁을 인증하는 주소인 셈이다. 동서로는 245m, 남북으로는 490m 규모의 왕궁리 유적은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발굴조사가 아직 진행 중이다.
익산 미륵사지는 무왕 때 창건된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미륵사가 있던 터다. 해발고도 430m의 미륵산 아래 넓은 평지에 펼쳐져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무왕이 왕비인 선화공주와 용화산(미륵산) 아래 큰 연못을 지나가다가 미륵삼존이 나타나자 선화공주의 요청으로 연못을 메워 절을 지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에 미륵삼존(법당 가운데 있는 미륵불과 좌·우 보살)을 상징해 세 곳에 탑과 금당(본당), 회랑을 세웠다. 원래 미륵사 동·서 쪽에 각각 탑을 하나씩 짓고 그 사이에 목탑이 들어서 있었는데 목탑은 소실됐고 동·서 쪽 두 탑은 복원됐으나 모두 최악의 복원 실패작이란 비판을 받고 있다.
김정필 <한겨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