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피치 미술관 내 조르조 바사리 회랑. 바사리 회랑은 1566년에 축조됐다.│ ©Txllxt TxllxT·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로마에서 북서쪽으로 230km 거리에 있는 이탈리아 중부 도시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발상지다. 신이 지배하던 1000년 세월 중세 암흑기가 끝나고 인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르네상스와 인문주의 운동이 탄생한 곳, 그곳이 바로 피렌체다.
르네상스의 중심에는 예술이 있었다. 피렌체에서 태어난 르네상스가 전 유럽으로 뻗어나가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우도록 엔진 역할을 한 주체는 불세출의 천재 예술가들이었다. 비상한 두뇌와 창의적인 실험정신, 불굴의 의지와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이들이 없었다면 르네상스는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주역으로 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천재들의 면면은 화려하다. 르네상스 3대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를 시작으로 조토, 마사초, 브루넬레스코, 프라 안젤리코, 도나텔로, 기를란다요, 파울로 우첼로, 베로키오뿐 아니라 르네상스 3대 문인 단테, 보카치오, 페트라르카에 이어 근대 물리학의 아버지 갈릴레이, 근대 정치학의 교과서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르네상스 시대를 빛낸 영웅들이다.
천재는 시대를 잘 만나야 빛이 나는 법, 피렌체를 기반으로 350년간 이탈리아 정치경제계를 주름잡은 메디치 가문이야말로 르네상스 천재들이 마음껏 진가를 드러낼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강력한 후원자였다. 르네상스 천재 예술가들과 피렌체라는 도시, 메디치 가문은 삼위일체였다.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만 없었더라도 르네상스는 무위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 운동의 진정한 승자라 할만하다. 피렌체 하면 떠오르는 우피치 미술관이 바로 메디치 가문의 컬렉션을 토대로 세계적인 미술관 반열에 오른 르네상스 예술의 보고다.
▶카라바조, ‘메두사’, 캔버스에 유화, 60×55cm, 1598│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우피치 미술관│©Samuli Lintula·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천재 예술가들을 알아보는 탁월한 안목
메디치 가문은 1400년대 초반부터 1737년까지 약 350년간 피렌체의 정·재계를 장악한 가운데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 각국으로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며 르네상스가 탄생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명문 가문이다. 특히 은행업이라는 상업 자본을 앞세운 특정 가문이 정계와 재계를 300년 넘게 지배한 사례는 동서양을 통틀어 유일무이하다는 점에서 메디치 가문의 명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가문이 배출한 인물만도 교황 3명, 피렌체 공작 1명, 토스카나 대공 7명, 프랑스 왕비 1명, 프랑스 왕 3명 등 면면이 화려하다.
메디치 가문이 후대에 길이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은 수백 년에 걸쳐 부와 권력을 독점한 명문가로 득세한 것뿐 아니라 천재 예술가들을 알아보는 탁월한 안목과 그들이 마음 놓고 창작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인류 역사를 빛낸 불후의 명작들이 세상에 나오게 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메디치 가문의 출발은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나 정치·경제적 기반을 확립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조반니 디 비키 데 메디치(1360~1429) 때부터다. 가문 사업의 핵심인 메디치 은행을 설립한 뒤 유럽 여러 국가에 지점을 개설한 조반니는 문화예술과 인문학을 지원하고 교회를 후원하며 피렌체의 실질적인 지배 세력으로 부상했다.
메디치 가문의 경제력은 1412년 교황청과 자산관리업무 계약을 체결하면서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게 된다. 조반니를 도와 본격적으로 경영일선에 뛰어든 아들 코시모 메디치(1389~1464)는 1434년 피렌체 공화국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메디치 가문의 왕조시대를 열었다. 코시모는 피렌체 공화국의 국부로 불린다.
코시모의 손자 로렌초 메디치(1449~1492)는 르네상스 황금기 때 피렌체를 통치한 인물로 예술가들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정치가 겸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특히 미켈란젤로 등 수많은 예술가를 후원하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견인해 ‘위대한 자 로렌초’란 별칭으로 유명하다. 로렌초의 둘째 아들 조반니 데 메디치(1475~1521)가 후에 217대 교황에 오른 레오 10세며 로렌초의 증손녀 카트린(1519~1589)은 프랑스 왕 앙리 2세와 결혼해 아들 3명을 프랑스 왕위에 등극시켰다.
로렌초 남동생의 아들 줄리오 데 메디치(1478~1534)는 219대 교황 클레멘스 7세, 레오 10세의 조카 손자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는 232대 교황 레오 11세로 각각 영예를 누렸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캔버스에 유채, 199×162.5cm, 1614~1620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캔버스에 유화, 119.2×165.5cm, 1538
300년에 걸쳐 수집한 메디치 가문 컬렉션
피렌체의 자랑, 우피치 미술관은 초대 토스카나 대공을 지낸 메디치가의 후손 코시모 1세(1519~1574)의 설립계획에 따라 공사가 시작됐다. 피렌체를 다스리던 1560년경 코시모 1세는 행정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고 등·퇴청의 편의를 위해 기존의 청사 베키오궁과 메디치가의 궁정인 피티궁 사이에 신청사를 짓기로 하고 당대의 건축가 조르조 바사리(1511~1574)에게 설계를 맡겼다. 이탈리아어로 관청을 의미하는 ‘우피치’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이 때문이다.
1574년 코시모 1세와 바사리가 같은 해에 사망하자 토스카나의 2대 대공인 메디치 가문의 프란체스코 1세(1541~1587)는 바사리의 설계 원안을 계승한다는 조건으로 새로운 건축가 베르나르도 부온탈렌티를 임명해 후에 미술관으로 용도 변경되는 우피치 궁을 완공했다. 이때가 1580년 무렵이었다.
안마당인 중정(中庭)을 중심으로 두 채의 건물과 그 사이를 잇는 회랑으로 이뤄진 ‘ㄷ’자 형태의 회색 대리석 3층 건물인 우피치 미술관은 압도적인 위엄이 일품으로 르네상스 건축의 정수로 꼽히고 있다. 회랑은 설계자 바사리의 이름을 따 바사리 회랑 또는 바사리의 복도로 불린다. 완공 후 메디치 가문의 컬렉션들을 전시하기 시작했고 1737년 메디치가의 마지막 후손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1667~1743)가 피렌체시에 기증하면서 컬렉션 향유권을 대중들에게 넘겼다.
300년에 걸쳐 수집한 메디치 가문의 컬렉션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 14~16세기 르네상스 회화를 비롯해 17~18세기의 바로크·로코코 작품, 독일과 플랑드르 지역 화가들의 작품을 망라하고 있다. 미술관 내 45개의 전시실에 2500여 점의 작품이 소장돼 있다.
제목과 작가명, 재료, 제작연도 등 미술 작품에 명제(이름표)를 달아 관람의 편의를 도모한 최초의 미술관이며 근대화된 디스플레이(진열) 방식을 최초로 양식화한 곳도 우피치 미술관이다. 1870년 이탈리아반도가 통일된 뒤 국립미술관이 되었다. 원래 다수의 조각품도 소장하고 있었으나 1800년 국립 바르젤로 미술관과 국립 고고학미술관으로 대다수가 이관됐다.
▶산드로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캔버스에 템페라, 172.5×278.5cm, 1485년경│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가문의 모든 컬렉션 피렌체시 정부에 기증
메디치 가문이 없었다면 우피치 미술관도 없었을 것이다. 우피치 미술관 컬렉션은 곧 메디치 가문의 컬렉션이다.
우피치 컬렉션은 메디치 왕조의 개척자인 코시모 메디치 시절 본격적으로 시작돼 메디치가의 마지막 피렌체 지배자인 7대 토스카나 대공 잔 가스토네 데 메디치(1671∼1737)까지 300년 동안 계속됐다.
가문의 수장들은 직접 작품을 수집하거나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에게 주문 제작하는 방식으로 컬렉션의 질과 양을 늘려나갔다. 특히 우피치 미술관의 모태인 우피치 궁 건설을 지시한 코시모 1세 때부터 여러 장소에 흩어져 있던 가문의 소장품들을 우피치 궁으로 옮겨 총괄 관리하면서 컬렉션은 체계적인 모습을 갖추게 됐다.
예술품은 공익성을 지닌 문화유산이라 궁극적으로 대중들의 품으로 돌아갈 때 진정한 가치를 발휘한다는 선조들의 유지를 받들어 1737년 가문의 모든 컬렉션을 피렌체시 정부에 기증한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도 우피치 미술관의 오늘을 있게 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메디치 가문의 막대한 재산이 사회적으로 환원된 결정판이 바로 우피치 미술관의 컬렉션이다.
피렌체의 영화(榮華) 컬렉션 하나하나에 새겨져
우피치 미술관에 가면 옛 피렌체의 영광을 볼 수 있다. 르네상스의 진원지로 새로운 문화창달을 맨 앞에서 이끈 도시 피렌체의 영화(榮華)가 화석처럼 컬렉션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조토 디 본도네의 ‘오니산티 마돈나’(1310년경), 파올로 우첼로의 ‘산 로마노 전투’(1436~1440), 프라 안젤리코의 ‘성모 마리아의 대관식’(1434~1435), 필리포 리피의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1460년경~1465년경),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1485년경), ‘프리마베라’(1481~1482),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동방박사의 경배’(1480~1482), 미켈란젤로의 ‘성 가족’(1503~1506), 라파엘로의 ‘도요새와 함께 있는 성모’(1505~1506),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 카라바조의 ‘바쿠스’(1598년경), ‘메두사의 머리’(1598), 등 르네상스 시대의 걸작들을 감상할 수 있다.
초기 바로크 회화의 수작으로 꼽히는 여성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1614~1620)도 우피치 미술관 소장품이다.
박인권 문화 칼럼니스트_ PIK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전 <스포츠서울> 문화레저부 부장과 한국사립미술관협회 팀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와 사랑에 빠진 그림> <미술전시 홍보, 이렇게 한다>, 미술 연구용역 보고서 ‘미술관 건립·운영 매뉴얼’ ‘미술관 마케팅 백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