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삼척에서 열린 정월대보름제 축제에서 기줄다리기 행사에 참여한 참가자들이 두 팀으로 나뉘어 대치하고 있다.│삼척시
새해 덕담을 나눈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정월대보름이 훌쩍 지났다. 정월대보름은 음력으로 한 해의 첫 달인 정월에 가장 밝은 달이 뜬 날이다. 우리 선조들은 설날보다 정월대보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서 여러 의미를 담은 의식을 치렀다. 한 해 농사가 잘 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오곡밥과 아홉 가지 나물을 차려 먹기도 하고 한 해 부스럼 예방 및 치아 건강을 바라는 의미로 호두 같은 견과류를 어금니로 깨무는 풍속도 있다.
마을 단위로 축제도 열렸다. 농악 연주는 정월대보름 축제 내내 마을의 흥을 돋웠고 쥐불돌리기와 달집태우기, 강강술래 등 세시풍속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 가운데 가장 대규모 놀이는 바로 줄다리기였다. 굳이 놀이 방법을 설명해야 할까 싶지만 두 편이 마주 보고 줄을 잡아당겨 줄의 중앙을 더 많이 끌어오는 쪽이 이기는 놀이다.
보통 정월대보름 직전 해에 추수한 짚을 엮어 크고 긴 줄을 만든 뒤 마을 사람 모두 참여해 두 팀으로 나눠 승부를 겨뤘는데 이 단순한 놀이로 한 해 풍년과 흉년을 점치기도 했다. 일종의 신앙성까지 내포하고 있었던 셈이다. 요즘은 줄다리기 줄이 가늘지만 예전엔 지름 1m 안팎에 길이가 50~60m에 이를 정도로 대형이었다. 줄다리기 참여 인원은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에서 수천 명에 이르렀다. 남녀 편을 갈라 여자 편이 이길 때 풍년이 든다는 속설이 있어서 여자 편이 승리하도록 남자 편이 양보하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다고 한다.
2015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지정
이처럼 줄다리기는 농경문화의 산물이다. 벼농사 문화권에서 가장 중요한 건 당연히 농사다. 그러려면 공동체의 단결력이 중요했고 결속력을 끌어내기에 줄다리기만 한 놀이는 없었다. 단순 명료한 승부 방식으로 전 구성원이 참여하는 형태인 데다가 남녀노소 불문하고 오직 승리라는 목표를 향해 전력을 쏟아붓는 연대감이 하나의 줄을 타고 같은 편에 공유됐던 것이다.
줄다리기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게임>에 등장할 정도로 우리에겐 오래전부터 흔하디흔한 전통 놀이다. 어쩌면 너무 익숙하고 가까이 있어 소중함을 잊고 지내지 않나 싶은데 줄다리기는 2015년 유네스코가 인정한 무형문화유산이다. 재밌는 점은 여러 국가가 공동 등재했다는 사실이다. 등재 주체는 우리나라 외에도 베트남과 캄보디아, 필리핀이 있다. 유네스코에 등재한 공식 명칭은 영문으로 ‘Tugging rituals and games’이다.
줄다리기 유네스코 공동 등재는 사실 우리나라 주도로 성사된 숨은 뒷얘기가 있다. 우리나라가 ‘다국가 공동 등재’ 모델을 최초로 끌어낸 것이다. 우리나라 등 4개 국가는 모두 벼농사 문화권 국가로 풍년을 비는 의식 수단으로 줄다리기 문화가 공히 존재했다. 이에 우리나라는 2012년부터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상대로 줄다리기 유네스코 공동 등재를 추진했고 그 결과 베트남·캄보디아·필리핀이 참여 의사를 밝혀 2015년 결실을 맺었다. 4개 국가가 힘을 보태 유네스코와 줄다리기에서 멋진 승리를 끌어낸 셈이다.
▶◀충남 당진의 기지시줄다리기 민속 축제를 앞두고 일반인들이 줄다리기 제작에 참여해 큰 줄을 꼬는 작업을 하고 있다.│당진시
지자체 줄다리기 축제로 지금까지 전승
그런데 우리나라 줄다리기 문화에선 다른 나라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점이 하나 있다. 바로 경기 시간이 길다는 점이다. 우리 조상은 마지막 승부를 내기 전까지 짧으면 하루, 길면 사나흘 동안 여유롭게 줄다리기를 했다. 상대 힘이 부족해 줄이 달려와 판세가 기울면 슬쩍 힘을 빼 줄의 균형을 맞추는 등 승부 자체보다는 승부로 가는 과정에서 모두가 다지는 화합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경기 중간에 일부는 잠깐 대열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고 다시 돌아오기도 했다.
길고 긴 승부가 남긴 전리품인 줄은 썰어서 이긴 편이 전부 나눠 갖거나 마을 구성원 모두가 한 움큼씩 잘라 갖고 갔다. 쓰임새는 여러 곳이었다. 농작물이 병들지 않고 풍년이 든다는 믿음 때문에 논에 거름으로 뿌리기도 했고 마을 입구에 있는 액막이돌에 감아두기도 했다. ‘가축 여물로 주면 잘 큰다’, ‘물고기를 잡으러 배를 타고 나갈 때 갖고 가면 풍어가 든다’ 등 온갖 속설이 있어서 줄다리기 참여자라면 서로 갖고 가려 했다.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는 줄다리기는 충남 당진의 기지시줄다리기, 강원 삼척의 기줄다리기, 경남의 영산줄다리기 등이 있다. 매년 해당 지방자치단체가 지역 행사로 줄다리기 축제를 열고 있으니 옛 줄다리기의 웅장한 원형을 체험하고 싶다면 직접 방문해보길 추천한다.
김정필 <한겨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