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내셔널 갤러리 전경│©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트래펄가 광장 앞에 서 있는 조지 4세 국왕의 기마상│©Aaron Bradley·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사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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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은 한 나라의 자부심이자 긍지다. 그곳에 가면 그 나라의 국격과 기품있는 국민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미술관은 단순히 예술작품을 모아놓은 곳이 아니다. 국가의 정체성과 국민정신의 총화가 서려 있는 곳, 그곳이 바로 미술관이다.
19세기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런던에 가면 영국인의 자존심에서 잉태돼 오늘날 세계 유수의 문화관광 명소로 사랑받는 미술관이 있다. 바로 내셔널 갤러리다. 런던의 중심부 트래펄가 광장 한복판에 자리한 내셔널 갤러리는 설립 정신에서부터 미술관의 공익적 가치와 역할이 오롯이 구현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루브르 박물관을 비롯해 유럽의 유명 미술관들은 대부분 왕실이나 귀족들의 호화 컬렉션을 모태로 설립된 공통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내셔널 갤러리는 처음부터 영국의 자랑이 될만한 국가브랜드로서 미술관의 필요성을 대중들에게 호소한 가운데 범국가 차원의 활발한 기금 모금 운동이 전개됐고 수많은 개인 소장자들의 기증을 토대로 미술관이 성장해온 점이 특징이다.
소수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닌 국민 누구나 자유롭게 언제든지 문화예술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도록 출발했다는 점에서 내셔널 갤러리는 태동과 발전 과정에서 가장 모범적인 국립미술관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국립미술관이라 정부의 지원을 받지만 일체 간섭에서 자유로운 독립적인 기구로 운영되고 있는 점도 본받을만하다. 오늘날 영국의 국립 박물관과 국립 미술관들이 기본적으로 무료입장 정책을 고수하는 것도 내셔널 갤러리의 설립 정신을 계승한 덕분이다.
▶내셔널 갤러리의 자연채광 천장│©MrsEllacott·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축구장 6개 크기에 유럽 회화 2300여 점 소장
1824년 영국 정부가 개인 컬렉션을 사들여 런던 팔몰 가(街) 100번지에서 문을 연 내셔널 갤러리는 1838년 지금의 트래펄가 광장 자리에 새로 지은 건물로 이전 개관한 뒤 여러 차례의 증·개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지난 1991년 신관으로 모습을 드러낸 세인즈버리관을 포함해 서관, 북관, 동관 등 4개의 전시관으로 이뤄져 있다.
13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유럽 회화 23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는데 유럽 미술사를 시기별로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는 명품 컬렉션으로 평가받고 있다. 축구장 6개 크기의 전시장에 거의 모든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는 점도 다른 미술관과 차별되는 특징이다.
런던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데다 모든 상설 전시를 무료로 개방하고 있으며 1월 1일과 12월 24일~26일 4일간을 빼고는 연중무휴로 운영된다는 점에서 공익성과 접근성이 단연 돋보인다.
내셔널 갤러리가 들어선 트래펄가 광장은 1805년 스페인 남서 해안의 트래펄가 해상전투에서 영국군이 나폴레옹 군대를 물리친 승리를 기리기 위해 조성됐다. 원래 왕실의 정원이었으나 조지 4세 국왕(1762~1830, 재위 1820~1830)이 1820년대에 수립한 재개발 계획에 따라 1845년 무렵 광장으로 변모했다.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광장은 신년 축하 행사가 벌어지는 등 영국인들이 가장 즐겨 찾는 명소다. 트래펄가 전쟁 당시 영국 해군을 지휘하던 중 전사한 넬슨 제독(1758~1805)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바다의 제왕’이라 불린다. 트래펄가 광장에 세워진 50m 높이의 넬슨 기념비는 전쟁 영웅 넬슨의 업적을 상징하는 조형물이다.
▶트래펄가 광장의 명물 분수대│ ©CrisNYCa·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소장품 3분의 2가 기증·기부로 조성
산업혁명의 발상지인 영국은 예술 분야에서는 이웃 유럽 국가들에 뒤처져 있었다. 1793년 바다 건너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이 문을 열자 애써 자존심을 감추고 있던 영국 여론이 들끓었다. 19세기 영국 풍경화의 거장 존 컨스터블(1776~1837)이 국립미술관의 부재를 강력하게 비판했고 영국 의회도 예술작품은 국민 누구나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는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라며 국립미술관 설립은 선택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과제임을 역설했다.
1824년 마침내 영국 정부는 1년 전 사망한 금융사업가이자 미술 애호가였던 존 앵거스타인의 소장품 38점과 런던 팔몰 가 100번지에 있던 그의 저택을 사들여 그곳에서 내셔널 갤러리의 출발을 알렸다. 미술관의 작품 구매와 개인 소장자들의 계속된 기증으로 소장품이 늘어난 데다 협소한 공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831년 지금의 자리에 새로운 미술관을 짓기로 하고 1832년 건축가 윌리엄 윌킨스에게 공사를 맡겼다.
6년 후인 1838년 트래펄가 광장 북쪽에 신고전주의 양식의 웅장한 건물로 개관한 내셔널 갤러리는 네 차례의 증축과 개축 과정을 거치는 등 소장품과 전시 공간의 규모를 계속 확장했다. 1991년에는 사업가 세인즈베리 가문의 기부금으로 5층 규모의 신관을 건축했는데 세인즈베리관이다. 소장품의 3분의 2가 개인 소장자들과 일반 시민들의 기증과 기부로 조성된 점도 내셔널 갤러리의 설립 취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내셔널 갤러리의 특징은 연대순으로 소장품들을 상설 전시하는 것인데 세인즈베리관은 1260~1510년 작품, 서관은 1510년~1600년 작품, 북관은 1600년~1700년 작품, 동관은 1700년~1900년 작품을 각각 무료로 공개하고 있다. 고흐와 모네, 세잔의 작품을 볼 수 있는 동관의 인기가 높다.
내셔널 갤러리의 또 다른 특징은 영국 국립미술관의 원조이지만 정작 영국 회화는 별로 없다는 점이다. 영국 미술 작품만을 위한 별도의 국립미술관, 테이트 브리턴이 1897년 설립된 가운데 1996년 양대 국립미술관은 1900년 이후의 영국 회화를 테이트 브리턴으로 이관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모든 작품이 같은 층에 전시돼 있어 계단을 오르내릴 필요가 없는 것도 내셔널 갤러리 관람 동선의 매력이다.
대표적인 소장품으로는 고흐의 ‘해바라기’,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 윌리엄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 호’ 등이다.
▶윌리엄 터너, ‘전함 테메레르’, 캔버스에 유화, 90.7×121.6cm, 1839│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대표 소장품은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 호’
내셔널 갤러리를 얘기할 때 윌리엄 터너(1775~1851)를 빼놓을 수 없다. 터너는 컨스터블과 함께 19세기를 빛낸 영국 풍경화의 쌍두마차로 500점이 넘는 유화와 2000점의 수채화, 3만 점의 스케치 등 방대한 규모의 유품을 영국 국민에게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테이트 갤러리에서 ‘터너 컬렉션’이란 타이틀로 관객들과 만나고 있지만 대표작이자 내셔널 갤러리의 상징으로 불리는 ‘전함 테메레르 호’는 여전히 내셔널 갤러리를 지키고 있다.
지난 1984년에는 윌리엄 터너의 이름을 딴 ‘터너상’을 테이트 브리턴에서 제정해 해마다 50세 미만의 영국 미술가에게 시상하고 있다. ‘터너상’은 국제적인 권위의 대표적인 현대미술상이다. 영국인들이 얼마나 터너를 사랑하는지는 2020년 2월 20일부터 20파운드 지폐의 모델로 등장했다는 데서 드러난다. 종전 모델은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1723~1790)였다. 또 BBC방송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영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가 터너로 밝혀졌고 가장 위대한 그림으로 ‘전함 테메레르 호’가 선정되기도 했다. 2015년에는 터너의 삶을 다룬 전기 영화 <미스터 터너>도 개봉됐다.
‘전함 테메레르 호’는 터너가 64세 때 그린 내셔널 갤러리의 수호신 같은 명작이다. 1805년 트래펄가 전투에서 맹위를 떨치며 영국군의 승리를 이끌었던 전투함인 테메레르는 그림에서 보다시피 당시의 용맹한 모습은 간데없고 뼈대만 앙상한 초라한 몰골이다. 왜일까? 이 그림은 트래펄가 전투가 있은 지 30년도 더 지난 1839년에 완성됐다. 군함이나 사람이나 매한가지,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수십 년의 풍상을 겪은 테메레르도 어쩔 수 없이 수명을 다한 것이다. 터너가 붓을 들을 당시 테메레르 호는 해체를 위해 마지막으로 정박 중인 모습이다. 원제가 ‘해체를 위해 예인되는 전함 테메레르 호’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공교롭게도 터너도 테메레르 호와 마찬가지로 이 그림을 그렸을 때 이순(耳順)을 훌쩍 넘긴 노년이었다. 과거의 화려했던 영광과 명성을 찾을 길 없는 테메레르를 보면서 터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2차 세계대전과 내셔널 갤러리
루브르 박물관과 마찬가지로 내셔널 갤러리도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 무렵 소장품들을 웨일스의 여러 장소로 분산시켜 보관하는 안전 조치를 취했다. 독일의 프랑스 침공 후 보안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소장품들은 웨일스 북부의 지하 채석장으로 다시 옮겨진 뒤 전쟁이 끝나고서야 트래펄가로 돌아왔다.
전쟁 중 미술관은 당연히 휴관이었다. 이때 영국의 유명 피아니스트 미라 헤스(1890~1965)의 제안으로 내셔널 갤러리에서는 매일 오후 1시 클래식 음악 연주회가 열렸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공포에 떨던 영국인들에게 큰 위안이 된 연주회는 1939년 10월부터 1946년 4월까지 6년 6개월 동안 계속됐다. 헤스는 영국인들의 긍지와 사기를 드높인 공로를 인정받아 1941년 대영제국 작위급 훈장(2등급)을 받았다.
박인권 문화 칼럼니스트_ PIK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전 <스포츠서울> 문화레저부 부장과 한국사립미술관협회 팀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와 사랑에 빠진 그림> <미술전시 홍보, 이렇게 한다>, 미술 연구용역 보고서 ‘미술관 건립·운영 매뉴얼’ ‘미술관 마케팅 백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