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에 있는 팔달문. 조선시대 서울과 삼남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했다.│ 수원문화재단
영화 <사도>는 아버지 영조(송강호)와 아들 사도세자(유아인)의 갈등을 줄거리로 조선왕조 가장 비극적인 가족사를 그려낸다. 악화일로를 걷던 부자 관계는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칼 한 자루를 던져주고는 자살을 종용하면서 파국을 맞게 된다. 영조는 자살을 거부한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버린다. 빛 한 줄기, 물 한 모금 없는 뒤주에서 사도세자는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훗날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소지섭)는 세자에 책봉되고도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한 아버지 사도세자가 감내한 고통의 시간을 어린 시절 온전히 목도하고 기억한다.
2000여 개에 이르는 조선 성곽 건축 가운데에서 백미로 꼽히는 수원화성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는 정조의 지극한 효심에서 첫 돌이 괘졌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제22대 왕 정조는 경기 양주 배봉산 초라한 땅에 버려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조선 최대 명당인 경기 수원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을 조성하고 화산 부근에 있던 행정기관을 수원 팔달산 아래로 옮기면서 수원화성을 축성했다. 지금으로 설명하자면 신도시를 지으며 방어 목적으로 성곽을 조성한 것이다.
과학·건축·예술 접목된 독보적 건축물
1794년 2월 착공해 2년 6개월 만인 1796년 9월 완공된 수원화성은 성곽 전체 길이가 5.74㎞로 높이 4~6m의 성벽이 130㏊의 면적을 에워싸고 있다. 조선시대 개혁 군주 정조가 당파정치의 근절과 왕도정치의 실현이란 구상을 담아 정치 중심 도시로 지은 곳이 바로 수원화성이다.
수원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유네스코는 크게 다섯 가지를 등재 사유로 꼽았다. 첫째, 처음부터 계획돼 신축된 성곽이란 점 둘째, 거주지로서 읍성과 방어용 산성을 합해 하나의 성곽도시로 만들었다는 점 셋째, 전통적인 축성 기법에 동·서양의 새로운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점 넷째, 기존 우리나라 성곽에 흔치 않았던 다양한 방어용 시설이 많이 첨가됐다는 점 다섯째, 주변 지형에 따라 자연스러운 형태로 조성해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수원화성 축성에는 정약용 등 실학자 여럿이 참여해 완성도를 높였다. 실제 활차와 녹로(도르래), 거중기 등 신기술의 활용, 동서양 축성술의 접목 등 18세기 과학과 건축, 예술을 두루 살필 수 있는 가장 독보적인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흔히 교통이 발달한 곳에 ‘사통팔달’이란 수식어를 쓰곤 한다. 사통팔달이란 말은 수원화성의 사대문 중 남쪽 문인 팔달문에서 유래됐다. 수원 진입로에 있는 팔달문은 서울과 삼남지방(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관문 역할을 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과거시험을 치르러 상경하는 선비도, 물건을 사고파는 상인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보니 팔달문 인근에는 항상 사람과 물품이 넘쳐났다. 정조는 팔달(八達)의 의미를 ‘(인근) 팔달산 이름이 팔달이어서 문도 팔달이며 사방팔방에서 배와 수레가 모인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했다.
▶1801년 간행된 화성성역의궤에 실린 수원화성전도│한겨레
세계기록유산이 된 화성성역의궤
수원화성은 다른 성곽과 달리 등산화를 챙겨 신지 않고도 도심을 탐방하듯 편하게 산책할 수 있는 코스로 잘 정비돼 있다. 상공에서 수원화성을 내려다보면 41개의 문과 누(적의 동정을 살피려고 높이 지은 곳), 치(성곽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시설), 돈(높게 두드러진 평평한 땅) 등이 하트모양의 곡선을 만들어내고 있다.
수원화성의 사대문은 팔달문(남문)과 장안문(북문), 창룡문(동문), 화서문(서문)이다. 조선시대 건축에는 위계질서가 존재한다. 같은 성문이라도 팔달문과 장안문은 창룡문과 화서문보다 한 단계 격을 높인 형태로 지어졌다. 창룡문은 동쪽을 지키는 신령한 청룡을 상징한다. ‘화성의 서쪽 문’이란 뜻의 화서문은 밖으로는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어서 주변을 감시하려고 높다란 서북공심돈을 함께 세웠다. 서북공심돈은 적의 동향도 살피고 공격도 가능한 시설로 수원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정조가 가장 만족스러워한 건축물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사실 수원화성을 이야기할 때 <화성성역의궤>를 빼놓을 수는 없다. 정조는 화성 축성의 사소한 과정까지도 모두 기록으로 남기도록 명을 내렸고 그 결과물이 바로 1801년 간행된 <화성성역의궤>다. 화성 시설물의 그림과 설명이 상세히 담겨 있는 책인데 유네스코는 2007년 <화성성역의궤>를 세계기록유산으로 인정했다.
수원화성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훼손됐으나 축조 기록이 담긴 <화성성역의궤>의 존재 때문에 거의 완벽하게 복원에 성공했다. 기록의 중요성을 새삼 되새기며 그 옛날 위기를 기회로 삼고 미래를 내다본 정조의 혜안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김정필 <한겨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