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 77×53cm, 나무판에 유화, 1503~1506
대표 소장품 10선
48만 점이 넘는 방대한 컬렉션을 자랑하는 루브르 박물관은 2차 세계대전 때 한 사람의 뛰어난 예지로 보석 같은 소장품 사수에 성공했다. 1940년 6월 프랑스를 점령한 독일 나치 정권은 프랑스 내 모든 예술품의 이동을 금지했다. 프랑스 정부가 점령국의 약탈을 피해 미술 작품을 숨기는 것을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독일군 장교가 루브르에 파견됐지만 모나리자 등 명품 컬렉션 4000여 점은 박물관에 없었다. 독일의 침략을 예감한 자크 조자르(1895~1967) 루브르 박물관 관장이 전쟁 발발 전인 1939년 8월 하순 주도면밀한 계획 아래 주요 소장품을 프랑스 내 비밀 장소에 숨겨놓았기 때문이다. 조자르의 선견지명이 없었다면 오늘날 모나리자는 루브르 박물관에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계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루브르 박물관 대표 소장품 10선을 소개한다.
1. 루브르 박물관의 상징 ‘모나리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대표작이자 루브르 박물관의 상징이다. 피렌체의 돈 많은 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와 결혼한 리자 게라르디니의 초상화로 조콘도의 부인이라는 뜻의 라 조콘다(La Gioconda)라고도 불린다. 16세기 초 조콘도의 주문으로 그린 이 그림은 수수께끼 같은 신비로운 미소와 눈썹이 없는 얼굴로 유명하다. 눈가와 입가에서 드러나듯 윤곽선을 손으로 문지른 듯이 연기처럼 흐릿하게 처리한 스푸마토(sfumato) 기법을 창안한 다빈치의 파격적인 실험정신이 오롯이 드러난 그림이다. 볼 때마다 신비감과 상상력을 부추기는 효과를 자아내는 것도 바로 이 스푸마토 기법 때문이다.
1911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도난 사건과 복원과정에서 지워졌다거나 화학반응에 의한 탈색이라는 눈썹을 둘러싼 논쟁, 그림을 주문자에게 전달하지 않고 다빈치 본인이 보관하다 프랑수아 1세 프랑스 왕의 수중으로 넘어간 점 등 숱한 의혹과 얘깃거리도 모나리자의 명성을 확고하게 만든 동력이다.
▶‘큐피드의 키스로 소생한 프시케’, 155×168×101cm, 대리석, 1793│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2. ‘큐피드의 키스로 소생한 프시케’
로마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신 큐피드가 죽음의 잠에 빠진 아내 프시케를 키스로 되살리는 모습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형상화한 이탈리아 조각가 안토니오 카노바(1757~1822)의 작품이다. 공주 신분으로 출중한 미모의 프시케는 큐피드의 어머니이자 미의 여신인 비너스(아프로디테)의 노여움을 샀다. 노여움의 이유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신인 자신보다 예쁜 인간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프로디테는 큐피드가 프시케에게 화살을 쏘아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남자와 사랑에 빠지도록 음모를 꾸미지만 막상 프시케를 본 큐피드는 눈부신 미모에 넋을 잃고 어머니의 뜻을 거슬러 결혼을 감행했다. 단 조건이 있었다. 신분을 감추기 위해 프시케에게 절대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말라는 당부였다.
그러나 호기심을 참지 못한 프시케는 결국 남편의 얼굴을 보게 되고 실망한 큐피드는 그의 곁을 떠나버린다. 큐피드를 백방으로 찾아다니던 프시케는 어느 날 비너스의 계략에 넘어가 황금 상자를 열어본 뒤 깨어날 수 없는 잠에 빠지게 된다. 상자 안에 죽음의 잠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안 큐피드가 프시케에게 달려가 사랑의 입맞춤으로 프시케를 살려낸다는 신화를 조각으로 구현한 작품이다.
▶‘밀로의 비너스’│©Fred Romero from Paris, France·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3. 고대 그리스 대표 조각상 ‘밀로의 비너스’
그리스 신화 속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표현한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조각상이다. 기원전 100년경 작품으로 추정되는 높이 203cm의 대리석 입상이다. 1820년 에게해의 밀로스섬에서 한 농부에 의해 두 팔이 없이 파손된 채로 발견돼 ‘밀로의 비너스’로 불린다. 작가는 미상. 이상적인 미의 전형인 황금비율(1:1.618)이 적용된 작품으로 콘트라포스토로 대표되는 고대 그리스 조각 양식과 정교한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헬레니즘 조각 양식 둘 다 엿볼 수 있다.
콘트라포스토는 오른 다리로 무게중심을 잡고 왼 다리는 무릎을 살짝 구부린 자세다. 인체를 S자의 곡선으로 비스듬하게 서 있는 모습으로 연출한 이 자세는 골반 부위의 관능미를 부추기고 생동감과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특징이다. 흘러내릴 듯 하체를 덮고 있는 의상의 주름 묘사가 압권이다.
▶‘함무라비 법전’, 225×79×47cm│©Deror av·i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4.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함무라비 법전’
기원전 1750년경, 고대 바빌로니아의 왕 함무라비가 법치주의를 주창하며 높이 2.25m의 검은색 현무암 돌기둥에 새긴 법전. 법전 윗부분에 왕과 신이 만나는 장면이 부조로 형상화돼 있고 그 아래 몸통에 법전 내용이 새겨져 있다. 거의 400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원형 그대로 완벽하게 법전 내용이 보존된 것도 재질이 튼튼하고 강한 현무암 덕분이다. 부조 오른쪽 인물이 바빌로니아의 태양신이자 정의의 신인 샤마시(shamash). 왼쪽이 왕을 상징하는 지팡이를 건네받고 있는 함무라비 왕이다.
1901년 이란 서남부의 고대 도시 수사에서 발굴됐으며 설형문자로 된 서문과 본문 282개 조, 맺음말로 이뤄져 있다. 메소포타미아 제국을 통일한 함무라비 왕이 국가 체제의 제도적 정비와 자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성문법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잘 알려진 보복법 성격과 계층에 따라 형벌이 달라지는 신분별 차등 징벌제, 일부 증거주의 원칙의 적용 등이 특징이다.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여신, ‘니케상’│©Lyokoï88·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5.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여신 ‘니케상’
루브르 박물관 드농 관에 입장해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맨 위 넓은 홀에서 우리를 반기는 조각상이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여신’, 일명 니케상이다. 니케는 그리스 신화 속 승리의 여신으로 기원전 190년경 에게해에서 벌어진 해전의 승리를 기념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니케가 큰 날개를 휘날리며 지중해에 떠 있는 뱃머리에 내려앉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1863년 프랑스 고고학자 샤를 상푸아소가 에게해 북쪽 사모트라케 섬에서 100여 개의 흩어진 파편 조각들로 발견한 뒤 루브르 박물관으로 보내 3년간의 복원과정을 거쳐 1879년 최초로 공개됐다. 얼굴도 없고 양팔도 없는 길이 328cm로 복원된 니케 상은 해풍에 휘감긴 옷자락 모양과 활짝 편 날개와 왼쪽 다리의 자세에서 기풍 당당하면서도 우아한 미가 돋보이는 헬레니즘 조각의 정수로 평가받고 있다. 니케 상의 날개는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 로고의 모티브다.
▶자크 루이 다비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캔버스에 유화, 621×979cm, 1805~1807
6.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신고전주의의 거장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가 나폴레옹 1세의 황제 즉위식 장면을 그린 그림. 3년에 걸친 제작 기간에 세로 621cm, 가로 979cm의 웅장한 크기에다 200명이 넘는 인물이 등장하는 초대형 작품이다.
1804년 12월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성대하게 거행된 대관식 장면은 나폴레옹을 영웅적으로 미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교황 비오 7세가 나폴레옹에게 왕관을 수여하는 게 아니라 나폴레옹이 황후 조세핀에게 왕관을 하사하는 방식으로 그려졌다. 나폴레옹의 키도 실제보다 크게 부풀려졌다. 나폴레옹은 이미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있고, 의자에 앉은 교황은 뭔가 불만스러운 제스처를 하고 있다. 교황 주위의 성직자들도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다. 왕관을 들고 서 있는 나폴레옹의 왼쪽 대각선 방향으로 기품있는 모습으로 좌정한 여인이 보이는데 나폴레옹의 어머니다. 조세핀과 결혼을 반대한 나폴레옹의 어머니는 실제 대관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렘브란트, ‘목욕하는 밧세바’, 캔버스에 유화, 142×142cm, 1654
7. ‘목욕하는 밧세바 여인’
구약성경의 이야기 한 토막을 소재로 한 렘브란트의 그림. 심각한 표정으로 목욕 중인 여인은 밧세바. 이스라엘의 왕 다윗의 부하의 아내인 그가 근심 가득한 이유는 오른손에 들고 있는 편지 탓이다. 편지에는 다윗이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유부녀임을 알면서도 왕이 청혼했으니 어찌 걱정이 없을까. 다윗이 부하의 부인에게 프러포즈한 이유는 단 하나, 빼어난 미모 때문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야외에서 목욕하는 일이 당연지사였다. 실내 목욕시설이 있을 리 없고 무더운 산악지대라 집 바깥 훤히 노출된 곳에서 몸을 씻는 일이 일상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여자들의 알몸을 볼 수 있는 시대였다. 다윗도 우연히 밧세바가 목욕하는 모습을 본 뒤 송두리째 마음을 빼앗긴 것이었다. 다윗의 계략에 따라 밧세바의 남편은 전쟁터에서 의도적인 죽임을 당한 뒤 둘은 결혼해 아들을 낳는데 그가 솔로몬이다.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캔버스에 유채, 260×325cm, 1830
8.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낭만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프랑스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의 기념비적인 역사화. 1830년 7월 프랑스 국왕 샤를 10세의 기본권 제한 칙령에 반발해 일어난 시민혁명인 7월 혁명을 기념해 제작한 그림이다. 샤를 10세가 축출되고 루이 필리프가 새로운 왕위에 오르게 된 7월 혁명의 전선에 직접 가담하지 못한 들라크루아가 그림을 통해서라도 조국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다짐 끝에 나온 예술적 산물이다.
프랑스 국기를 든 여신의 뒤를 따라 죽은 동지들의 시체를 넘으면서 진격하는 군중들의 모습을 담았다. 삼각형의 구도로 그려진 그림으로 자유의 여신의 왼편에 총을 들고 있는 인물이 들라크루아 자신이다.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캔버스에 유화, 491×716cm, 1818~1819
9. 낭만주의 그림의 효시 ‘메두사의 뗏목’
19세기 유럽 열강들의 식민 통치 시대에 벌어진 해상 참사를 눈앞에서 보는 듯, 생생하게 고발한 역작이다. 화가는 프랑스 낭만주의의 선구자 테오도르 제리코(1791~1824). 극한 상황에서 야만인으로 전락하는 인간의 본성을 다룬 윌리엄 골딩의 소설 ‘파리 대왕’을 떠올리게 하는 이 그림의 배경은 1816년 7월 2일. 프랑스 정부가 아프리카 식민지인 세네갈을 통치할 원정 선단을 꾸리고 출항한 날이다. 선단의 호위함인 범선 메두사호가 암초에 부딪혀 침몰 위기에 빠진 가운데 승선한 400여 명 중 급조한 뗏목으로 밀려난 노예 등 140여 명이 12일 동안 표류 끝에 15명만 살아남은 아비규환의 현장을 영웅적 서사 없이 비극적으로 묘사한 낭만주의 그림의 효시다.
▶앵그르, ‘그랑드 오달리스크’, 캔버스에 유화, 91×162cm, 1814│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10. 관행 무시한 혁신 ‘그랑드 오달리스크’
자크 루이 다비드의 제자로 신고전주의 화풍에 현대 미술의 숨결을 불어 넣은 앵그르(1780~1867)의 대표작. 터키 황제 술탄의 은밀한 욕구를 밀실에서 충족시키는 여자 시종(侍從)을 뜻하는 오달리스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그림이다. 관례를 깨고 현실 인물이 모델로 등장한 점, 이슬람 황실 문화에 호기심이 분출했던 유럽 사회의 단면이 엿보이는 그림이다. 오달리스크를 알몸으로 내세워 관능미를 한껏 추켜세운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정작 이 그림의 파문은 회화의 원리원칙을 신앙처럼 추종한 정통 고전주의자들이 들고 일어난 것에서 시작됐다. 허리와 팔이 기형적으로 길고 뼈도 근육도 없는 것이 사람의 몸 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앵그르의 생각은 달랐다.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극대화할 수만 있다면 해부학과 황금비율 등 관행적인 미의 기준을 무시하고 왜곡된 기법을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이 앵그르의 지론이었다. 앵그르는 혁신론자였다.
박인권 문화 칼럼니스트_ PIK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전 <스포츠서울> 문화레저부 부장과 한국사립미술관협회 팀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와 사랑에 빠진 그림> <미술전시 홍보, 이렇게 한다>, 미술 연구용역 보고서 ‘미술관 건립·운영 매뉴얼’ ‘미술관 마케팅 백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