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창덕궁 돈화문 앞에 수문장들이 서있다.
우리 미술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혜곡 최순우의 책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한 번쯤 읽어봤을 것이다. 최순우는 회화와 도자기, 조각, 건축 등 우리의 미를 담백한 언어로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 중 하나는 궁궐의 후원을 묘사한 글이다.
“동산이 담을 넘어들어와 후원이 되고 후원이 담을 넘어 번져 나가면 산이 되고 만다. 담장은 자연 생긴 대로 쉬엄쉬엄 언덕을 넘어가고 담장 안의 나무들은 담 너머로 먼 산을 바라본다. 한국의 후원이란 모두가 이렇게 자연을 자연스럽게 즐기는 테두리 안을 의미할 때가 많다.”
궁궐의 안팎을 나누는 담장이 자연과 후원을 경계 짓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울리도록 하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는 이야기다. 궁궐의 담장을 인간의 표정에 비유하면 외부의 침입을 적대시하는 경계병의 험상궂은 얼굴이 아니라 인심 좋은 이웃의 환한 미소라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 왕들이 가장 사랑한 궁궐
서울 강북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창덕궁 후원은 이런 표정을 가득 담고 있다. ‘비원’이란 이름이 더 낯익겠지만 이는 일제강점기에 생긴 용어라서 ‘후원’으로 부르는 게 낫겠다. 후원의 아름다움은 창덕궁을 유네스코 세계유산(1997년 12월 등재)으로 만든 숨은 공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궁으로 꼽히는 창덕궁은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우리나라의 유일한 궁궐이다. 입구인 돈화문에서 신비로움을 품고 있는 후원까지 이어지는 창덕궁은 자연과 조화를 이룬 가장 한국적인 미를 지녔다.
그런 까닭에 조선왕조 최초, 최고의 궁궐은 경복궁이지만 왕들이 가장 사랑한 궁궐은 창덕궁이란 말이 있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창덕궁이 소실됐을 때 규모가 작은 창덕궁이 먼저 복구돼 사용됐기 때문에 왕들이 가장 오랜 시간 머문 궁궐이기도 하다.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 때 정궁으로 사용한 뒤부터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258년 동안 조선 임금들이 정사를 보살핀 법궁이었다.
경복궁에서 창덕궁까지는 걸어서 20분이면 도착할 거리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이처럼 가까운 거리에 두 개의 궁궐을 따로 지은 것일까?
창덕궁은 원래 1405년 경복궁의 이궁(임금이 나들이 때 머물던 별궁)으로 지은 궁궐이다. 피비린내 나는 1·2차 왕자의 난을 정리하고 제3대 태종으로 왕위에 오른 뒤 한양으로 천도를 결정한 이방원은 형제 사이에 살육을 벌인 경복궁으로 환궁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경복궁 동쪽에 새로 지어 들어온 궁궐이 바로 창덕궁이다.
▶서울 종로구 창덕궁 희정당에서 열린 특별관람에 참가한 관람객들이 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전각 내부로 입장하고 있다.│ 한겨레
동양 조경의 정수 ‘후원’
창덕궁에는 가장 오래된 궁궐 정문인 돈화문이 있다. 궁궐 내부로 들어서면 신하의 하례식이나 다른 나라 사신의 접견 장소로 쓰이던 인정전, 국가의 정사를 논하던 선정전, 왕과 왕후 및 왕가 일족이 거처하는 희정당, 대조전 등의 침전 공간이 있다. 그리고 연회와 산책, 학문을 할 수 있는 넓은 후원도 조성돼 있다.
평지에 터를 잡은 경복궁이 조선 왕실의 위세와 엄숙함을 보여준다면 북한산 자락을 포근히 감싼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미가 돋보인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경복궁은 주요 건물이 일직선으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는 반면 창덕궁 건물들은 북한산 자락의 골짜기에 자연스럽게 안기도록 배치해 비정형적 조형미를 극대화하고 있다.
특히 창덕궁 후원은 300년 넘는 거목과 다양한 형태의 정자, 괴석이 어우러진 아름다움으로 화룡점정을 찍는다.
창덕궁 후원 입구를 들어서면 부용지와 애련지, 연경당, 관람지, 옥류천으로 이어지는 약 2.5km의 비밀 정원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펼쳐진다. 왕의 휴식처로 사용되던 후원은 창경궁으로도 통하도록 했다.
창덕궁은 조선시대 전통 건축으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한 건축과 조경이 고도의 조화를 표출하고 있다. 창덕궁의 백미인 ‘비밀의 정원’ 후원에선 동양 조경의 정수를 감상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산에서 내려온 호랑이가 창덕궁 후원에 종종 모습을 드러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호랑이해인 임인년, 창덕궁을 찾아 호랑이 기운을 받고 새해 힘차게 출발하면 어떨까? 참, 창덕궁 후원 관람은 사전 예약이 필수다.
김정필 <한겨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