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영, ‘슬픔’, 브론즈, 88×42×50cm, 2016,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마음먹고 국립중앙박물관에 다녀왔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을 보기 위해서였다. 이미 여러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처럼 국보 78호와 83호 반가사유상이 한 공간에 나란히 전시되고 있다. 이례적인 기회다. 하물며 별도로 독립된 전시실이 마련됐으니 더욱 각별하지 않을 수 없다. 전시공간 연출을 현역 건축가가 했다는 뉴스도 화제가 됐다.
‘사유(思惟)의 방’이라고 이름 붙여진 전시장은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2층에 마련됐다. ‘사유의 방’을 꾸민 주인공은 최욱. 섬세함이 돋보이는 인테리어 솜씨로도 잘 알려진 건축가다. 전시품 못지않게 그가 설계한 공간을 체험할 수 있다는 기대가 박물관을 찾는 발길에 한몫했다.
둘 모두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타원형 진열대 위에 나란히 배치된 반가사유상은 아름다웠다. 신묘한 조형성에 대한 찬사는 굳이 재론하지 않겠다. 시대와 국가, 종교를 초월한 인류의 문화유산임을 새삼 실감했다. 박물관이라 하면 자칫 재미없고 지루하고 고답적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유의 방’은 이런 우려를 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과거와 현재의 멋진 조화 명불허전, 금상첨화였다.
▶김승영, ‘당신은 당신으로부터 자유롭습니까?’, 오백나한 32점, 벽돌, 8채널 사운드, 2019, 국립중앙박물관 설치 광경
패러디와 비물질로 구현한 공간예술
김승영은 설치미술가다. 설치미술이 무엇인가? 회화나 조각처럼 고정된 장르가 아니다.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고 자유로운 진열(디스플레이)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미술 양식이다. 이제 설치미술은 동시대 미술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미술(예술)작품은 내용과 형식의 결합체다. 내용은 메시지고 형식은 이미지다. 둘 중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곤란하다. 내용 없는 형식은 공허하고 형식 없는 내용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좋은 미술(예술)이란 내용과 형식이 균형을 잘 이룬 작품이다. 설치미술가 김승영 작품이 그렇다.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을 패러디한 작품 ‘슬픔’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얼핏 보면 국보 83호 반가사유상과 똑같아 보인다. 하지만 ‘다른 그림 찾기’ 하듯 천천히 살펴보면 뭔가 살짝 다른 점을 발견하게 된다. 오른손의 손가락 모양과 위치. 원본 반가사유상에서 가냘픈 손가락은 턱과 뺨 근처에 살포시 맞닿아 있다. 반면 작품 ‘슬픔’에서 오른손 손가락은 좀 더 위쪽, 눈 근처에 있다. 마치 흐르는 눈물을 닦는 듯하다. 고개도 훨씬 앞쪽으로 숙이고 있고 표정도 다르다.
원본은 입술과 입꼬리가 살며시 위로 치켜 올라가 있다. 그래서 오묘한 미소를 짓는 듯 보인다. 반면 ‘슬픔’은 입꼬리가 밑으로 처져 있다. 그래서 왠지 침통하고 먹먹한 느낌이다. 이처럼 어떤 원작을 의도적으로 모방, 재해석하는 표현 방식을 패러디라 한다. 표절이나 도용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김승영은 원본을 살짝 바꾸고 비트는 재해석, 패러디를 통해 자신이 하고 싶었던 ‘슬픔’에 대한 메시지, 이야기를 전달한 것이다.
▶김승영, ‘어머니의 의자’, 철판, 물, 전기장치, 93×48×46cm(9개), 2013,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설치 광경
이미지로 인간 내면의 감정 표현
오래된 유물을 활용한 또 다른 전시가 있다. 2019년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열린 <영월 창령사 터 오백나한, 당신의 마음을 닮은 얼굴展>이 그것이다. 밭에서 일하던 농부가 발견한 오백나한상(五百羅漢像)이 국립춘천박물관에 전시됐다. 이때 전시장 공간연출을 김승영이 맡았다. 박물관 유물 진열이 곧 설치미술이 된 셈이다. 국보 78호, 83호 반가사유상을 나란히 보여주는 ‘사유의 방’보다 한발 앞서 시도된 획기적인 프로젝트였다.
이 전시는 그해 전국 국립박물관 전시 가운데 가장 우수한 전시로 선정됐고 이를 기념해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히 다시 선보였다. 이때도 김승영이 진열을 맡았다. 산사(山寺)에서 녹음한 소리가 나오는 스피커 탑(塔)과 오백나한을 함께 배치했다. 바닥엔 글씨가 새겨진 벽돌을 깔았고 그 틈새엔 살아 있는 이끼를 심었다. 과거와 현재, 고대 유물과 현대미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멋진 설치미술이었다.
이처럼 김승영은 의외의 장소에서 전시를 많이 했다. 작업실에서 완성한 그림이나 조각을 전시장 벽에 걸거나 좌대 위에 올려놓는 단순한 방식이 아니라 특별한 장소에서 직접 작품을 완성하는 프로젝트 말이다. 이를 ‘장소 특정적 미술(Site-Specific Art)’이라고도 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개관 기념전에 선보인 ‘어머니의 의자’가 대표적이다. 미술관 야외 잔디밭에 빨간색으로 칠한 의자 아홉 개가 뜨문뜨문 놓였다. 철판으로 만들어진 의자에는 겉으로 보이지 않게 전기장치(보일러)를 숨겨놨다. 그래서 거기에 앉으면 사람 체온과 같은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추운 날씨에도 시장 좌판에서 일했던 어머니를 생각하며 만든 작품이었다. 작가가 겪은 체험과 이야기를 관객과 공유하고자 한 의도였다. 성찰, 화해, 치유, 자유, 감사, 행복, 희망, 소통…. 무형의 정서, 인간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는 설치미술가 김승영이 전달하고픈 메시지다. 작가의 어머니는 2017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수여하는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을 받았다.
이준희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겸임교수_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창작에서 전향해 몇 년간 큐레이터로 일했고, 미술 전문지 <월간미술>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까지 맡아 18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것보다 여전히 아티스트에 가까운 ‘미술인’으로 불리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