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에고 벨라스케스,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 캔버스에 유화, 141×119cm, 1650년경, 로마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 소장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 파블로 피카소(1881~1973), 살바도르 달리(1904~1989). 세 인물은 불세출의 화가로 당대를 호령한 미술계의 지존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스페인이 배출한 국보급 화가들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도적인 화풍을 앞세워 서양미술사에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입체파 화가 피카소와 초현실주의 화가 달리가 20세기 현대미술을 주름잡았다면 벨라스케스는 17세기 바로크 시대 미술계를 지배했다.
피카소와 달리보다 3세기 선배인 벨라스케스는 빛과 색채를 자유자재로 다뤘을 뿐 아니라 다층적이면서 독창적인 구도에 입각한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기풍을 정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연금술사를 방불케 하는 빛과 색채에 대한 천재적 감각은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에게 강렬한 영감을 제공했다. 특히 말년에 제작한 ‘시녀들’(1656~1657)에서 드러나듯 복잡다단한 창조적 화면 구성은 스페인의 후배 화가 피카소와 달리를 사로잡았다.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 중인 유화 작품 ‘시녀들’은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1605~1665, 재위 1621~1665)의 딸인 마르가리타 공주를 중심으로 공주의 시녀와 난쟁이, 궁녀, 호위병, 개, 집사, 왕과 왕비, 심지어 벨라스케스 본인도 등장하는 미스터리한 그림이다. ‘주체가 사라진 재현’, ‘사물과 분리된 인식’ 등 미술의 영역을 뛰어넘어 인문·사회학적으로도 숱한 논쟁거리를 제공하며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수수께끼 같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시녀들’, 캔버스에 유채, 318×276cm, 1656~1657.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소장│ⓒ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교황의 초상화 중 역사상 가장 유명
‘시녀들’을 그리기 6~7년 전인 1650년경, 벨라스케스는 또 한 점의 파격적인 그림을 선보인다. 바로 제236대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1574~1655, 재위 1644~1655)를 그린 초상화다. 벨라스케스의 초상화 중 첫손에 꼽히는 걸작이자 교황의 초상화 중에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다. 벨라스케스의 빼어난 색채 감각과 놀라운 관찰력이 투영된 이 그림은 생동감이 넘치는 사실성과 교황의 성격과 심리까지 고스란히 읽을 수 있는 초상화의 진수로 평가받고 있다.
찌푸린 미간과 꽉 다문 입술, 매섭게 쏘아보는 레이저 눈빛은 엄격하고 까다로우면서 욱하는 교황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벨라스케스의 그림 실력에 탄복한 교황이 직접 주문했다는 이 그림을 본 교황이 오죽하면 ‘닮아도 너무 닮았군’이라고 했을까?
16세기 마지막 해인 1599년 스페인 세비야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벨라스케스는 남다른 관찰력과 미술적 재능으로 10대 때 이미 초상화와 정물화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등 발군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24세 때 펠리페 4세 국왕의 왕실 전속 화가로 임명돼 61세로 죽을 때까지 마드리드 궁정을 떠나지 않았다.
벨라스케스는 궁정화가로 활동하던 30세 때와 50세 때 이탈리아를 직접 방문해 티치아노와 틴토레토 등 대가들의 작품을 주도면밀하게 연구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리얼리티 양식으로 승화시켰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는 벨라스케스가 두 번째로 이탈리아를 방문해 2년가량 로마에 머무를 때 그린 그림이다. 본명이 조반니 바티스타 팜필리인 인노켄티우스 10세는 70세가 되던 1644년 가톨릭계 절대 권력의 자리에 오른다. 초상화에 등장한 교황의 나이는 76세. 70대 중반을 넘긴 만년의 노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꼬장꼬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교황은 이미 오래전부터 벨라스케스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 교황은 1626년 스페인 주재 교황대사로 봉직 시 궁정화가 벨라스케스를 알게 됐다. 당시 교황의 초상화는 주로 이탈리아 화가들이 도맡았다. 인노켄티우스 10세는 권위적이고 까칠한 성품답게 초상화 주문도 까다로웠다. 웬만해선 초상화 모델로 나서기를 꺼렸다. 그런데도 스페인의 궁정화가 벨라스케스에게 선뜻 자신을 그려달라고 제안한 것은 그의 재능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다.
사실주의 화풍이 만개한 그림
오랫동안 교황을 지켜봐 성격과 스타일을 꿰뚫고 있던 벨라스케스는 최고위급 성직자의 위엄을 치켜세우는 영웅적인 묘사 방식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것은 살아 움직이는 듯 생생한 벨라스케스식 사실주의 양식과도 맞지 않았다. 그는 교황의 내면 심리와 평소 인품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로 했다. 인물의 특징과 심리 상태를 사실적으로 기록하듯 실제 모습의 정수를 캔버스에 옮겨놓은 것이다.
이 그림의 백미는 교황의 눈매와 눈빛에 있다. 날카롭게 째려보는 눈빛은 우리를 얼어붙게 만든다. 눈은 마음의 거울이다. 교황의 눈빛은 고집이 세고 다혈질이면서 카리스마 넘치는 교황의 성격을 웅변한다. 상대를 압도하는 교황 특유의 기질은 치켜 올라간 눈썹과 굳게 다문 입술, 정돈되지 않은 수염, 붉은 혈색의 피부에서도 묻어난다. 화려한 금으로 장식된 의자는 교황의 권위의 무게를 급상승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교황이 입고 있는 소매가 없는 망토 형태의 진홍색 겉옷인 케이프에 쏟아질 듯 빛이 내려앉아 눈부시게 빛이 난다. 빛의 마술사다운 벨라스케스의 솜씨다. 화면은 커튼과 케이프, 가톨릭 성직자가 쓰는 사각형 모자인 비레타를 중심으로 붉은색 기운이 주조를 이루는 가운데 흰색과 금색, 세 가지 색이 지배하고 있다. 절제된 색채는 자유롭고 부드러운 붓 터치와 어우러져 그림 전체에 강렬함과 생동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교황의 타고난 기질과 내면의 품성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추출한 벨라스케스의 사실주의 화풍이 만개한 그림이다.
박인권 문화 칼럼니스트_ PIK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전 <스포츠서울> 문화레저부 부장과 한국사립미술관협회 팀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와 사랑에 빠진 그림> <미술전시 홍보, 이렇게 한다>, 미술 연구용역 보고서 ‘미술관 건립·운영 매뉴얼’ ‘미술관 마케팅 백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