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20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백두산 정상인 장군봉에 올라 손을 맞잡고 들어올리고 있다.│한겨레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 중 가장 큰 외교·안보상의 업적은 무엇이 될까? 대통령 임기 중 전례없는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치러냈고 역사상 최초인 북미정상회담을 한 번에 그치지 않고 두 번이나 치를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역할을 맡았다.
어디 그뿐인가? 대한민국 정상으로서 최초로 북한 주민 수만 명이 운집한 대형 경기장에서 연설하는 기회를 가졌으며 남북 정상이 백두산 천지에 함께 가서 두 손을 맞잡기도 했다. 비록 이뤄지진 않았으나 북측 정상의 방남 약속을 받아냈고 그 때문에 남북 정상이 동반으로 제주도 한라산 정상에 다녀갈 것이라는 기대감이 고조되기도 했다.
남북이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일촉즉발의 장소인 최전방 감시초소(GP) 남북 각 10곳을 남북 군인들이 동시에 철거한 일도 있었다. 남과 북의 군인들은 휴전 이후 사실상 처음으로 비무장지대(DMZ)를 통과해 양측을 오가며 서로의 GP가 제대로 철거된 게 맞는지 검증 절차까지 밟았다. 상호 검증 초기 상대방이 속임수를 쓰는 건 아닌지 의심하며 언쟁까지 벌이던 양측 대표단은 시간이 갈수록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때론 농담을 주고받으며 과거 그들이 한 핏줄, 한 가족이었음을 상기했다.
남북관계는 ‘점 연결하기’
돌아보면 모두 꿈같은 일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일장춘몽이었다고 말하기엔 이룩한 성과가 너무 뚜렷하고 실질적이다. 이들 성과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사라지지 않고 단단히 결속되며 현재의 더 큰 어떤 사건이나 현상에 영향을 줄 것이다. 마치 아이폰을 개발한 스티브 잡스가 자신이 그 위치까지 오른 배경을 설명하면서 언급한 ‘점 연결하기’(Connecting Dots)처럼 말이다.
대학 중퇴자인 그가 미국 최고 명문대 중 하나로 꼽히는 스탠퍼드대 졸업식에 연사로 초청된 장면 또한 이례적이었지만 그가 이날 졸업생에게 설파한 ‘배고프고 어리석은 채로 남아 있으라’(Stay hungry, stay foolish)는 주제의 연설은 미국 대학 졸업식 역사상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연설로 꼽힌다. 과거는 하나의 점으로 남아 있지만 그 점들을 하나하나 연결하면 오늘의 나가 된다는 것이 연설의 핵심 포인트다.
남북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이미 지나간 빛바랜 과거로 인식하는 역사적 장면은 거기서 멈춰 있지 않는다. 과거의 특정 장면은 오늘의 어떤 순간과 맞물리면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고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문 대통령 임기 중 찍힌 점들은 미래를 위한 복선이다. 그리고 그러한 점들을 가장 최신의 시점에서 하나로 묶은 결과가 종전선언이다. 종전선언이 실현되면 그야말로 문 대통령이 임기 중 이뤄낸 외교안보상 최대의 치적이 될 것이다. 종전선언이라는 업적을 이룬 대통령을 칭송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대통령이 수많은 점을 찍고 수많은 돌을 놓은 결과 비로소 드러나고 있는 한반도 평화로 가는 징검다리의 윤곽을 반갑게 맞이하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종전선언이 어떤 법적, 제도적 장치로서 그 즉시 효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휴전협정을 공식적으로 대체할 협정은 평화협정이다. 종전선언은 휴전협정과 평화협정 사이의 어떤 정치적 영역인 것이다. 전쟁과 평화 사이에서 팽팽하던 균형을 ‘평화’ 쪽으로 조금 더 기울이는 기술적 장치에 가깝다.
종전선언을 향한 확고한 의지
남북은 2018년 세 번에 걸친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이미 사실상 종전을 선언한 것으로 풀이된다. 중요한 것은 6·25전쟁 참전국이자 ‘G2’로 불리는 오늘날 국제사회의 초강대국 미국과 중국이 종전선언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
일단 중국과 미국은 모두 종전선언에 대해 긍정 반응을 내놓고 있으나 미국에서는 최근 북한의 ‘선(先) 비핵화’를 전제로 한 신중론이 확산되고 있다.
양제츠 중국 공산당 외교담당 정치국원은 12월 2일 중국 톈진 시내 한 호텔에서 서훈 청와대 안보실장과 만나 “종전선언 추진을 지지하며 종전선언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증진시키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중국으로선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이 잇따라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에 대한 외교적 보이콧을 선언하고 있는 상황에서 서방의 견제 구도 완화를 위해 ‘약한 고리’인 우리나라와 접촉면을 늘리고자 애쓰는 형국이다. 실제로 청와대는 12월 8일 “베이징올림픽에 대한 외교적 보이콧을 검토하지 않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미국에서는 12월 7일(현지시간) 공화당 소속 하원의원 30여 명이 북한 주민의 인권 보장 없는 종전선언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서한을 조 바이든 행정부에 발송하는 등 종전선언 반대 목소리가 점차 거세지는 형국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의 종전선언을 향한 의지는 확고해 보인다. 문 대통령은 12월 2일 청와대에서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을 만나 종전선언 지지를 당부했고 12월 7일 화상회의로 열린 ‘서울 유엔 평화유지 장관회의’ 영상축사에서 국제사회를 향해 종전선언 지지를 재차 호소했다. 결국 종전선언에 미국을 어떻게 끌어들일 것인가가 관건인 셈이다. 과연 우리나라가 미국으로부터 종전선언을 동의받는 대가로 미국에 무엇을 건네야 할까?
김수한 헤럴드경제 기자 (북한학 박사·한국기자협회 남북통일분과위원회 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