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가르 드가, ‘발레 수업’, 캔버스에 유화, 85×75cm, 1871~1874, 오르세 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발레는 인체에 깃든 미학을 온몸의 동작으로 표현하는 무용 예술이다. 몸과 손발을 움직이는 동작만으로 예술적 경지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창조 행위 중에서 가장 본능적인 장르라 할 수 있다. 발레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19세기 프랑스 화단의 실력자로 이름을 떨친 화가 에드가르 드가(1834~1917)다. 부유한 은행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둔 이른바 금수저 출신인 드가는 그 시절 다른 화가들과 달리 어릴 때부터 돈 걱정 없이 좋아하는 그림을 마음껏 그릴 수 있는 복을 타고났다.
인상주의 화가들과 친분으로 인상파 화가로 불렸지만 정작 그는 야외에서 그림 그리기를 꺼렸다. 선천적인 녹내장 때문이었다. 화가에게, 특히 인상파 화가에게 야외 사생(寫生)에 나설 수 없는 점은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터. 여기에서 드가의 천재성이 발휘된다. 우선 그는 실외가 아닌 실내 장면을 타깃으로 삼았다. 고질적인 시신경 결함이라는 신체적 약점에서 벗어나 최대한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였다.
승부수는 찰나의 순간적인 움직임, 소재는 발레였다.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한 드가에게 상류사회의 사교 활동인 발레는 친숙한 예술이었다. 그가 발레를 그림의 주제로 선택한 데는 발레에 대한 친화적인 입장이 분명 영향을 끼쳤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드가는 평소 움직이는 물체의 운동감, 특히 사람의 움직임에 관심이 많았다. 발레야말로 인체의 움직임만으로 역동적 조형미를 빚어내는 육체 예술의 결정판 아닌가? 드가가 발레 그림에 예술적 승부를 걸게 된 가장 큰 동력이다.
발레리나 자연스러운 일상 그림에 담아
특이한 점은 드가는 무대 위에서 환호와 갈채를 받는 발레리나의 화려한 공연 모습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드가는 연습 장면이나 무대 밖에서 쉬거나 피로에 지친 모습, 발레 감독의 일장 연설이 지겨운 듯 졸거나 하품하는 모습 등 발레리나들의 자연스러운 일상을 그림에 담았다.
무대 밖 이면에 감춰진 발레리나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포착함과 동시에 당시 사회에 만연한 부르주아 스폰서(후원자) 문화의 실상을 고발하기 위해서였다. 드가가 그림 속 발레리나들 틈에 정장 차림의 신사를 슬쩍 끼워 넣은 것도 그런 의도에서였다.
드가 발레 그림의 특징은 한 편의 스냅사진을 닮은 점과 특이한 구도에 있다. 다양하게 잡아낸 인물들의 찰나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 스냅사진을 보는 것 같은 효과를 자아낸다. 등장인물들이 한 방향으로만 포진돼 있다거나, 심지어 신체 일부가 잘려나가게 묘사한 방식은 사진에서나 볼 수 있는 구도다. 극한의 순간적인 동작을 카메라 렌즈를 방불케 하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포착하고 생생한 운동감을 극대화하기 위한 드가 특유의 독창적인 시도가 낳은 결과였다. 드가의 눈은 카메라 렌즈나 다름없었다.
한때 법률가를 목표로 법학을 공부하기도 했으나 21세 때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하면서 화가의 길을 걷기로 한 드가는 정통 미술교육과 인상주의 기법, 일본 판화 우키요에와 사진술 등을 두루 섭렵하며 일상 속 움직이는 물체의 특징을 전광석화처럼 낚아채는 거장으로 발돋움했다.
‘발레 수업’은 드가의 발레 그림 중 가장 유명한 대표작. 텅 비어 있는 화면 중앙에 지팡이를 짚고 권위적인 자세로 서 있는 사람이 보인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발레리노이자 안무가 쥘 페로(1810~1892)다. 막 발레 수업을 끝낸 듯한 20명에 가까운 발레리나는 죄다 왼쪽 벽면 쪽으로 치우쳐 서 있거나 앉아 있다. 파격적인 구도다.
구도의 파격은 왼손을 허리에 댄 채 등을 보인 발레리나를 그림 맨 앞에 커다랗게 부각한 장면에서 절정에 달한다. 맨 오른쪽 하늘색 리본을 허리에 맨 소녀의 뒷모습 일부는 아예 잘려나갔다. 신체 일부를 생략함으로써 오히려 운동감을 살린 역발상이다. 클로즈업 효과와 함께 우키요에에서 볼 수 있는 기법이다. 산만하고 어수선한 발레리나들의 모습은 페로가 딛고 서 있는 휑한 마룻바닥으로 시선이 옮겨가는 순간, 팽팽한 긴장감으로 돌변한다. 절묘한 대립 구도가 아닐 수 없다. 화면 구성의 단순성을 단숨에 희석하는 장치다. 드가의 천재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소소한 움직임 하나하나 정교하게 되살려
찰나의 움직임을 좇은 드가의 섬세한 감각은 발레리나들의 몸짓, 표정에 고스란히 묻어 있다. 맨 왼쪽, 피아노 위에 걸터앉은 소녀는 왼손으로 등을 긁고 있고 바로 옆 겨우 얼굴만 보이는 소녀는 귀고리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생각에 잠기거나 발레 동작을 취하는가 하면 잡담을 나누고 기지개를 켜는 등 앳된 소녀들의 동작과 모습, 시선이 모두 제각각이다.
무대 아래 발레리나들의 자연스러운 일상과 애환을 기록사진 찍듯이 꼼꼼하게 잡아낸 드가의 관찰력과 집중력이 놀랍다. 다양한 인물의 소소한 움직임 하나하나를 이토록 정교하게 되살린 그림은 드가 이전에 없었다. 순간 포착의 대가라 불러 마땅하다. 드가가 굳이 무대 위가 아닌 무대 밖 장면에 초점을 맞춘 것도 정신적 긴장과 압박감에서 해방됐을 때 가장 자연스러운 있는 그대로 본모습이 드러난다는 점을 간파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림을 자세히 보면 오른쪽 끄트머리에 발레복이 아닌 일반 의상 차림의 나이 든 여성 몇 명이 눈에 들어온다. 발레리나들의 어머니로 짐작된다. 딸을 유명 발레리나로 키우기 위해 헌신적인 모성애를 아끼지 않는 모습은 발레 수업 현장에서도 여전하다. 이들 중 일부는 자녀 사랑의 극성스러움이 도를 지나쳐 돈 많은 스폰서한테 줄을 서기까지 한 당대의 부도덕한 실상을 드가가 점잖은 방법으로 꼬집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 하나, 실내 공간의 답답함을 뚫어주는 존재도 빼놓을 수 없다. 벽 가운데 뒤로 나 있는 창문이다. 그림에서 창문은 한가운데에 위치한 데다 멀리서도 바깥 풍경이 환하게 보일 정도로 큼지막해 실내 공간의 외연을 넓힐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도 탁 트이게 하는 청량제 역할을 하고 있다.
83세로 장수한 ‘발레 화가’ 드가는 파리 몽마르트르 가족 묘지에 묻혔다.
박인권 문화 칼럼니스트_ PIK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전 <스포츠서울> 문화레저부 부장과 한국사립미술관협회 팀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와 사랑에 빠진 그림> <미술전시 홍보, 이렇게 한다>, 미술 연구용역 보고서 ‘미술관 건립·운영 매뉴얼’ ‘미술관 마케팅 백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