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혐오 표현
1955년 12월 1일 미국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 버스 내 ‘흑인석’과 ‘백인석’이 분리됐던 당시 백인석이 꽉 찬 경우 흑인석은 백인에게 내주는 게 당연한 규칙이었다. 한데 이에 저항하는 이가 등장해 미국 사회가 발칵 뒤집힌다. 그의 이름은 로자 파크스. 그의 행동이 도화선이 돼 그해 몽고메리시 지역에선 인종분리법에 항의하는 ‘몽고메리 버스 안 타기 운동’이 일어난다. 로자 파크스는 지금도 흑인 민권운동의 불씨를 지핀 인물로 손꼽힌다.
인종에 따라 버스 내 누군가 앉을 수 있는 자리와 그렇지 않은 자리로 나뉘었다니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혀 혀를 끌끌 찰 일이다. 물론 그렇다 해서 지금 시대 인종차별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다. 우리는 아직도 사회 곳곳에서 인종차별을 목격한다. 때론 우리도 모르는 새 차별의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짱개, 쪽발이, 똥남아…
“짱개 시키자!” 많은 이들이 중국 음식을 주문할 때 ‘짱개’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일상에서 하도 쓰다 보니 그냥 우스갯소리인 줄 알았어요.”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는 짜장면을 속되게 이르는 중국인 비하 표현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일본인을 비하하고 멸시하는 의미가 담긴 표현도 많이 쓰인다. ‘쪽발이’가 대표적인 예다. ‘한 발만 달린 물건’이란 뜻을 가진 이 말은 일본 사람들이 엄지발가락과 나머지 발가락을 가르는 ‘게다’를 신는다는 데서 연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엔 베트남 이주노동자를 향해 ‘똥남아’라고 부르는 이들도 많다.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하는데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며 너 ‘똥남아’라고 하는 손님들을 보면 정말 기분이 나빴고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했습니다.” 베트남 이주노동자의 이야기다.
우리 사회에 인종차별과 혐오가 만연하다는 사실은 통계가 증명해준다. 국가인권위원회의 ‘한국사회의 인종차별 실태와 인종차별철폐를 위한 법제화 연구’(인종차별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로 이주해 생활하는 이주민 가운데 ‘한국에서 인종차별이 존재한다’고 답한 비율은 68.4%나 된다.
자기 입장에선 친근감을 드러내려 쓴 것이지만 상대에겐 불편함을 줄 수 있는 인종차별 표현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흑형’이라는 표현이다. 이는 ‘흑인 형’의 줄임말로 흑인이 운동도 잘하고 음악적 재능도 뛰어나다는 의미를 담은 신조어로 알려져 있다. 친근감 혹은 칭찬의 의미가 내포돼 있는데 왜 문제가 되냐고 할 수 있지만 듣는 입장에서 불편하다면 차별이다.
한 예로 모델 한현민 씨는 우리나라에서 살아가며 듣기 거북한 말로 ‘흑형’을 꼽은 바 있다. 그는 “흑형이라는 말은 우리가 듣기에 기분 나쁜 단어인데 그걸 모르고 쓰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생각해보면 ‘백형’, ‘황형’이라는 말은 쓰지 않으면서 왜 흑인의 피부색만을 강조해 ‘흑형’이란 말을 쓰는지도 의문이다.
때론 누군가의 피부색이나 인종, 혈통 등에 대한 정보를 꼭 언급할 필요가 없음에도 굳이 언급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혼혈’은 “인종이 서로 다른 혈통이 섞였다”는 뜻인데 상대적으로 다른 계통과 섞이지 아니한 유전적으로 순수한 계통이나 품종, 또는 타 집단 출신이 아닌 사람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태도인 이른바 순종주의적(純種主義) 표현이다.
살색? 살구색!
문화체육관광부는 <공공영역의 차별 표현 및 대체어 목록>을 통해 “특히 아이가 아닌 성인임에도 ‘혼혈’에 ‘아이’를 뜻하는 ‘아’(兒) 자를 붙여 ‘혼혈아’로 부르는 것은 이중적 비하의 의미로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불가피하게 인종, 혈통에 대한 정보를 드러내야 한다면 “한국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등으로 표현하면 될 일이다. ‘유색인종’이라는 표현 역시 피부색을 기준으로 삼아 백인 이외 인종을 비하하는 표현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사용을 자제하는 것이 좋다.
과거 황인종의 피부색을 뜻하는 의미로 써왔던 ‘살색’을 요즘 ‘살구색’으로 바꿔 쓰는 사람이 많아졌다. ‘살갗의 색깔’이란 의미로 쓰일 경우에는 차별적 표현이 아니지만 황인종의 피부색을 말할 때 ‘살색’이라고 하면 다른 인종의 피부색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차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일면서 한국기술표준원은 ‘살색’이라는 표준 관용색 이름을 ‘살구색’으로 바꾸기도 했다.
인권위 인종차별 연구에서 이주민들이 차별을 느끼는 사유가 ▲한국어 능력 62.3% ▲국적 59.7% ▲민족 47.7% ▲인종 44.7% ▲피부색 24.3% 순이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외쿡 사람’ 등 외국인의 서툰 한국어 발음을 웃음 코드로 사용하는 방송 프로그램은 수없이 많았다. 실제 외국인 방송인 타일러 라쉬는 과거 자신의 누리소통망(SNS)에 “‘외쿡 사람’이라는 표현은 나쁜 의도는 아니라지만 (들을 때마다) 왜 기분이 찝찝한 걸까요?”라고 올린 바 있다.
“그게 뭐라고 그렇게까지 기분이 나쁘지?” 이런 생각이 든다면 해외 운동경기 등에서 이른바 ‘눈 찢기’ 행동으로 동양인을 비하하는 외국 선수들의 모습이나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더 극심해진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 관련 뉴스를 떠올려보자. ‘짱개’, ‘흑형’, ‘외쿡 사람’ 등이 왜 불편한 표현인지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김청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