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윤석, ‘재기록-불이선란도’, 한지 오리기, 200×12cm(12장), 2007~2009 고암 이응노 생가 기념관 전시광경
“사막에서 길을 잃다”는 맞는 말인 동시에 틀린 말이다. 애초 사막에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 불시착한 생텍쥐페리. 그는 눈에 보이는 길이 아니라 마음의 길을 찾았다. 그의 발자국은 곧 길이 됐다. 예술가란 모래바람에 덮여 금방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사막에 길을 내는 사람이다. 오윤석도 그렇다. 사막에 길을 내는 사람이다. 무모함에 도전하는 예술가다.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는 어딘가에 오아시스를 감추고 있기 때문. 오윤석 작품이 각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00년 고암미술연구소에서 발간한 <고암 이응노, 삶과 예술>이 있다. 여기서 윤범모(국립현대미술관 관장)는 고암을 일컬어 ‘확실히 예외적인 작가’라고 규정했다. 2012년 제정된 고암미술상 제1회 수상자로 선정된 오윤석 역시 그러하다. 단편적이고 정형화된 수식어로 그를 규정 할 수 없다. 지금까지 오윤석이 발표한 작품은 대체로 ‘페인팅’보다 ‘드로잉’에 가깝다. 면보다 선, 색보다 형태, 그리고 정(靜)보다 동(動)적인 감각이 앞선다.
특히 구현된 이미지보다 (칼로) 오려내고 다시 꼬는 일을 반복하는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 여기서 과정이란 ‘염원’이 담긴 주술사의 읊조림이요, 구도자의 ‘수행’과 다르지 않다. 수없이 반복되는 작업과정은 몰입과 집중력의 결정체. 무아지경(無我之境)의 결과물이다. 이는 곧 깨어있는 의식에 통제되는 이성 너머 세계, 자아의 내면 깊숙한 곳에 감추어진 무의식을 드러내는 일이다. 황홀경의 세계다.
▶오윤석, ‘감춰진 기억–01’, 싱글채널 비디오, 4분 33초, 2012
행위로 구현한 수행(修行)의 이미지
오윤석이 첫 개인전을 연 해는 2003년. 지금까지 20회가 넘는 개인전을 열었다. 초기작은 은(銀)을 주요 소재로 사용했다. 작품 제목은 ‘정화하다’ ‘소통하다’ 등. 독성물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금속, 은을 이용한 점이 주목된다. 오윤석은 이미 이때부터 세상을 정화하고자 하는 의도를 품고 작품을 만들었다.
두 번째 시기는 문자와 형상을 칼로 오려내고 다시 꼬는 작업. ‘칼 드로잉’이라고도 한다. 추사의 <세한도>나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불교 경전 <금강경>처럼 한자와 그림이 어울린 고전을 원본으로 삼아 그 모양을 칼로 오려낸다. 그렇게 함으로써 문자가 지닌 원초적 기능은 사라진다. 대신 형태를 지닌 조형적 요소만 부각된다. 텍스트에서 이미지로, 가시적인 것에서 비가시적인 것으로 탈바꿈한다. 시각적인 것에서 정신적인 것으로 옮겨간다. 평면이긴 하되 완벽한 평면은 아니다.
표면에서 발산되는 질감은 시각보다 촉감으로 먼저 전달된다. 예리한 칼로 오려진 부분은 수직으로 세워져 돌출되면서 평면이 아님을 증명한다. 칼로 오려내는 작업과정은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된다. 엄청난 시간과 고행에 가까운 노동력 없인 불가능하다. 오윤석이 스스로 선택한 고독한 수행방법이다.
최근까지 매진하는 작업은 ‘감춰진 기억(Hidden Memories)’ 시리즈. 4분 33초짜리 동영상 작품 ‘감춰진 기억–01’은 2012년 처음 발표했다. 비슷한 형식의 작품을 계속해서 여러 점 제작하고 있다. ‘4분 33초’. 이 대목에서 존 케이지(1912~1992)가 떠오른다. 침묵의 소리, 연주하지 않는 연주, 소리 없는 음악을 선보인 전위 예술가다. 연상은 백남준(1932~2006)까지 이어진다. 백남준은 1990년 서울에서 먼저 간 동료 존 케이지를 추모하는 한판 굿 퍼포먼스를 펼쳤다. 요란하고 시끌벅적했다. 무악(巫樂)과 피아노, 심지어 요강과 곰방대까지 동원됐다. 산 사람 백남준이 죽은 사람 존 케이지를 위해 펼친 진혼곡이었다.
▶오윤석, ‘재기록 편지’, 149×138cm, 한지 오리기, 2007
세상을 치유하는 행위의 기록
다시 오윤석의 ‘감춰진 기억-01’로 돌아오자. 이 또한 침묵이다. 오직 움직임만 보인다.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신들린 듯 팔을 휘저으며 화면 위에 선을 긋는 소리, 작가의 거친 숨소리는 무음으로 배경에 깔린다. 그래서 오히려 화면에 올곧이 집중된다. 샤먼의 주술처럼 세상을 치유하는 행위의 기록이다. 그 염원이 담긴 특별한 존재의 흔적이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는 현재의 기록이었다. 여기서 시간은 현재에서 미래 방향으로 흘렀다. 반면 오윤석의 시간은 과거를 향한다. 현재에서 과거로 거꾸로 되돌아간다. 시간을 거스르는 역행이다. 새까맣게 칠해졌던 캔버스는 차츰 텅 빈 캔버스로 변한다. 겹겹이 중첩된 그림은 한 꺼풀씩 벗겨진다. 종착점에서 출발점으로 다시 향한다. 영상 속에 보이는 장면은 그림과 지움이 한 몸이다. 그리는 몸짓이 결국 그림을 지우는 꼴이 된다. 시간과 공간, 사람과 그림이 돌고 돈다. 윤회와 같다. 곧 좋은 세상이 오리라. 오윤석은 염원한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굿’이나 ‘부적’ 같은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준희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겸임교수_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창작에서 전향해 몇 년간 큐레이터로 일했고, 미술 전문지 <월간미술>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까지 맡아 18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것보다 여전히 아티스트에 가까운 ‘미술인’으로 불리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