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객 두 명이 남한산 능선에 축성된 산성을 옆으로 끼고 남한산성 둘레길을 걷고 있다.│한겨레
늦가을의 산은 단풍이 절경이다. 울긋불긋 물든 산도 어느덧 겨울옷을 갈아입을 채비다. 수도권에서 사랑받는 가을산을 하나 꼽으라면 주저 없이 남한산이다. 우리에겐 남한산이란 지명보다 남한산성으로 더 익숙한 곳이다.
살면서 너무 가까이 있어 진가를 몰라보는 것들이 있는데 남한산성이 그렇다. 수도권 최대 소나무 군락지인 남한산성은 201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수세기에 걸쳐 축조된 석돌 하나하나에 켜켜이 쌓인 남한산성의 역사성이 탁월하면서도 보편적인 인류의 가치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 자체로 지붕 없는 박물관 같은 존재인 남한산성. 우리는 남한산성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남한산성은 한강 이북의 서울시와 고양시 경계에 있는 북한산성과 마주 보며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이다. 드론을 띄워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경기도 광주시와 성남시, 하남시에 걸쳐 있다. 산성이 능선을 따라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지형이다.
서울 도심에서 동남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 있는 남한산성은 조선시대에 유사시를 대비해 건설한 도시다. 그래서 남한산성 안쪽에는 한양 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했던 행궁이 지금도 있다. 비상시 임금과 조정이 머물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남문주차장과 음식점 그리고 주말 등산 인파로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여담으로 남한산성 서문전망대는 서울 야경을 감상하기 가장 좋은 곳이다.
▶왕이 머물던 남한산성 행궁. 1999년 발굴조사를 거쳐 상궐과 좌전 등 일부 건물을 복원했다.│한겨레
우리나라 산성 축성 역사의 이정표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인조 4년에 후금(청)의 위협에 맞서려고 성곽을 대대적으로 구축했지만 사실 그 기원은 7세기 통일신라시대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의 옛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한 시대에 석돌을 쌓아 만든 산성이 아니라 통일신라시대부터 조금씩 증축돼 오늘날의 웅장한 모습을 갖춘 것이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인조와 숙종, 영조, 정조 시절 축성 기법이 달랐다. 그런 까닭에 시대별로 돌의 종류와 성곽을 쌓은 형태, 축성술이 저마다 개성을 뽐내면서도 조화로움을 갖추고 있다. 유네스코가 주목한 부분도 바로 이 대목이다. 남한산성은 우리나라 산성 축성 역사의 이정표이면서도 요새화된 도시 설계의 표본이라는 점이다.
16~18세기 동아시아 국가들의 산성 건축술이 상호작용한 증거를 보여주는 건축물이라는 점도 남한산성의 가치를 높인 점이다. 이 시기는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 사이에 전쟁이 빈번히 일어나 광범위한 교류가 이뤄졌다. 서구식 화포의 도입으로 새로운 무기 공격에 대비하고 장기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축성술이 발전하면서 동시대 군사공학적 방어 기술이 집대성된 건축물이 바로 남한산성이다.
조선 왕실이 남한산성을 임시 수도로 삼은 까닭은 무엇보다 지형적 이점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우선 도성에서 멀지 않은 거리로 대피가 용이했고 평균 고도 해발 480m 이상의 험준한 산세는 방어에 최적화돼 있다. 특히 둘레가 12km에 이르는 데다 그 안에 도시가 들어설 수 있을 만큼 넓은 분지가 자리 잡고 있어 다수의 인구 수용이 가능했다. 여기에 한강 수운과 연결된 데다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다.
외세가 침략해올 때 임금과 조정, 백성이 함께 대피할 수 있는 장소로 손색없었다. 그래서 남한산성 안쪽에는 오래전에 만들어진 군사, 행정, 종교 건축물부터 주민 거주 시설까지 살아 있는 유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고뇌와 고난의 역사적 장소
영화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시대적 배경이다. 남한산성으로 숨어든 인조와 조정 신하들이 청의 대군 공격에 대의명분을 지켜 죽음을 불사하고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인지, 무릎을 꿇고 순간의 치욕을 감수하더라도 백성의 목숨을 지킬 것인지를 두고 번민하는 극적 구성이 영화의 긴장감을 이끈다. 이조판서 최명길 역의 배우 이병헌은 실리를, 예조판서 김상헌 역의 배우 김윤석은 명분을 고집하며 영화 내내 팽팽히 맞선다.
지금은 도심 생활의 일상 속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남한산성이지만 한때 선조들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국가의 존망을 걸고 치열하게 고뇌했던 고난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남한산성 둘레길을 거닐며 한 번쯤 최명길과 김상헌의 길 가운데 누구의 절박한 호소를 택할 것인지 시간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뜻깊은 산책이 될 것 같다. 단, 등산객이 붐비는 주말 시간대는 피하길 권한다. 산행의 출발점이기도 도착점이기도 한 남문주차장에서 남한산성 바깥 도심으로 벗어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요새화라는 측면에서 남한산성은 시공을 초월해 100점짜리인지 모르겠다.
김정필 <한겨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