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10월 29일 프란치스코 교황과 단독 면담 후 선물을 주고 받고 있다. 문 대통령은 비무장지대(DMZ) 철조망을 녹여 만든 십자가를,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청 공방에서 제작한 기념패와 기도문이 담긴 책자를 선물했다.│청와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이탈리아를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10월 29일 오전 바티칸 교황궁을 방문해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직접 방북을 공식 제안했다.
문 대통령은 교황에게 “교황께서 기회가 돼 북한을 방문하신다면 한반도 평화의 모멘텀이 될 것”이라면서 “한국인들은 큰 기대를 하고 있다. 다음에 꼭 한반도에서 뵙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북한과 대화 노력이 계속되길 바라며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며 “초청장을 보내주면 여러분들을 도와주기 위해 평화를 위해 나는 기꺼이 가겠다”고 답했다. 또한 “(남과 북) 여러분은 같은 언어를 쓰는 형제이지 않느냐”며 되묻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앞서 2018년 10월 교황청 방문 때에도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방북을 제안한 바 있다. 당시 문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으로부터 교황님이 평양을 방문하시면 열렬히 환영하겠다는 적극적 환대 의사를 받았다”고 말했고 교황은 “초청장이 오면 무조건 응답을 줄 것이고 나는 갈 수 있다”고 답했으나 아직 방북이 성사되지 않고 있다.
당시 교황의 방북은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노딜’ 이후 분위기가 차갑게 식으면서 어려워졌고 이후 북한이 코로나19로 외부와 접촉 자체를 전면 차단하면서 더욱 악화됐다.
남북 교착상태 돌파구 될 교황의 방북
반전의 계기가 없지는 않았다. 2020년 6월 9일 끊긴 남북 통신선이 2021년 7월 27일 13개월여(413일) 만에 복원되면서 남북대화 재개 기대감이 한껏 부풀어올랐으나 8월 강행된 한미연합훈련에 북측이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남북대화의 실타래가 또 꼬이고 말았다. 교황의 북한 방문은 이러한 교착상태에서 돌파구가 될 수 있다.
문 대통령은 교황에게 폐철조망을 수거해 만든 십자가인 ‘평화의 십자가’와 그 제작 과정을 담은 이동식디스크(USB)를 전달했다. 남북이 평화를 이뤄 공존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문 대통령에게 교황청 공방에서 제작한 기념패, 코로나19로 텅 빈 성 베드로 광장에서 자신이 홀로 기도하는 사진과 기도문이 담긴 책자를 선물했다.
김정숙 여사가 “텅 빈 광장에서 기도하는 모습이 가슴 아팠다”고 하자 프란치스코 교황은 “역설적으로 그때만큼 많은 광장이 꽉 찬 적이 없다. 전 세계의 많은 사람이 함께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문 대통령은 2018년 만남을 떠올리며 “지난 방문 때 교황께서 한반도 평화를 위한 미사를 집전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대화 노력을 축복해 줬다”고 말하자 교황은 문 대통령에게 “언제든지 다시 오십시오(ritorna)”라고 답했다.
문 대통령은 또한 “한국천주교회가 민주화에 큰 공헌을 했고 코로나19 방역에 적극 협조했다”고 말하자 프란치스코 교황은 “나는 한국인들을 늘 내 마음속에 담고 다닌다. 한국인들에게 특별한 인사를 전해 달라”고 답하기도 했다.
G20 정상회의 참석차 수많은 각국 정상들이 이탈리아를 방문한 가운데 교황이 이들 정상 중 만남을 허락한 사람은 문재인 대통령,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등 세 사람뿐이었다.
DMZ 폐철조망으로 136개 십자가 제작
문 대통령 부부는 이날 오후에는 로마 산타냐시오 성당에서 열린 ‘철조망, 평화가 되다’ 전시회를 관람했다. 10월 29일부터 11월 7일까지 열린 이 전시회에는 교항에게 전달된 비무장지대(DMZ)의 폐철조망을 녹여 십자가 형태로 만든 ‘평화의 십자가’ 136개가 전시됐다.
6·25전쟁 휴전 이후 68년 동안 남북 양쪽이 모두 분단의 고통을 겪었다는 뜻에서 68의 2배수인 136개의 십자가를 사용했다. 문 대통령은 전시회에서 “성경에 전쟁을 평화로 바꾼다는 상징으로 창을 녹여 보습을 만든다는 구절이 있다”며 “이 십자가는 헤어진 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이산가족의 염원, 평화롭게 지내고 싶다는 대한민국 국민의 염원을 담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상상해 보십시오.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의 철조망이 철거되고 남북한 전쟁이 영원히 끝난다면 그곳에 남북한을 묶는 국제기구 사무실, 유엔의 평화기구, 남북 연락사무소가 들어서서 국제 평화지대로 변모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문 대통령은 “우리 정부 들어서 남북한의 대화가 이루어지고 군사합의가 이루어지고 적대행위를 중단하기로 합의를 함으로써 남북한의 군사적 긴장이 많이 완화되고 그만큼 평화가 증진되었다”며 “그에 따라 우리 정부는 철조망의 일부를 철거했는데 그 녹슨 철조망이 이렇게 아름다운 평화의 십자가로 변신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늘의 이 십자가는 그 의미에 더해서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헤어진 가족들을 만나고 싶다는 수많은 남북한 이산가족들의 염원과 이제는 전쟁을 영원히 끝내고 남북 간에 서로 평화롭게 지내고 싶다는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의 간절한 염원과 기도가 담겨 있다”고 역설했다.
문 대통령은 10월 31일 로마를 떠나며 “로마의 평화를 지키는 것은 성벽이 아니라 시민의 마음’이라 했다”며 “한반도의 평화 역시 철조망이 아니라 우리 국민들의 마음에 있을 것이다. 비무장지대 철조망을 녹여 만든 ‘평화의 십자가’를 로마에서 세계와 나눈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바이든 대통령, 마크롱 대통령, 메르켈 총리, 모리슨 총리, EU 폰 데어 라이엔 집행위원장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향한 한결같은 지지를 보여주었다”며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한반도 평화의 시계가 다시 힘차게 돌아갈 것이라 믿는다”고 강조했다.
김수한 헤럴드경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