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쾌대, ‘군상 Ⅳ’, 캔버스에 유채, 177×216cm, 1948(추정)
대중의 인기와 전문가 평가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불일치는 예술 분야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미술도 예외일 순 없다. 예컨대 일반인들은 대체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근대화가로 박수근(1914~1965)이나 이중섭(1916~1956)을 좋아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두 화가 그림은 미술시장에서 꽤 비싼 가격으로 거래된다.
반면 우리나라 근대미술사를 연구하는 학자나 전문가들은 이인성(1912~1950)과 이쾌대(1913~1965?)를 대표작가로 손꼽는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박수근이나 이중섭에 비해 이인성과 이쾌대가 대중들에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이유는 요절과 월북 때문이다. ‘천재 화가’ 소리를 듣던 이인성은 서른 여덟이란 젊은 나이에 권총 사고로 허무하게 죽었고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을 중시했던 이쾌대는 1953년 6·25전쟁 때 월북함으로써 오랫동안 우리나라 미술사에서 언급조차 할 수 없는 잊혀진 존재가 됐다.
이런 가운데 이중섭의 경우 제주도 서귀포에 그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생겼고 ‘이중섭 미술상’이 제정돼 권위 있는 미술상으로 자리 잡았다. 강원도 양구군엔 박수근미술관이 건립됐다. 그런가하면 대구시는 ‘이인성 미술상’을 제정해 시행하고 있다. 얼마 전 22회 수상자로 화가 유근택을 선정했고 현재 대구미술관에선 21회 이인성 미술상 수상자인 제주도 작가 강요배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이쾌대,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72×60cm, 1940년대
우리나라 근대 리얼리즘 회화의 거장
다른 작가들의 이런 기념사업에 비하면 이쾌대에 대한 평가와 재조명은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1988년 납·월북 미술인 해금 조치 단행으로 그의 존재가 복권되고 세상에 다시 이름이나마 알려지게 된 것은 다행이라 하겠다. 이후 1991년 신세계백화점 창립 29주년 기념으로 신세계미술관에서 유작전이 열렸고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라는 제목으로 대규모 회고전이 개최됐다.
이쾌대의 고향은 경상북도 칠곡군. 할아버지는 지금의 공수처 검사격인 금부도사, 아버지는 군수 격인 현감을 지낸 세도가 집안의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3만석꾼’으로 불렸을 만큼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이쾌대는 어려서부터 신학문과 기독교를 받아들이며 ‘모던 보이’로 성장했다.
화가 이인성과는 대구 수창보통학교 동창생이었다. 경성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한 뒤에는 그림보다 야구부 활동으로 먼저 이름을 알렸다. 그러면서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입선하는 등 그림에도 탁월한 소질을 발휘했다. 1933년 일본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로 유학하면서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쾌대는 식민지 조국이 겪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민족을 위한 화가의 소명이 무엇이고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했다. 전통과 우리 것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이쾌대 그림의 주제의식은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했고 결국 근대 우리나라 리얼리즘 회화의 전형으로 완성됐다.
1948~49년경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은 이쾌대의 대표작이다. 우리나라 시골 풍경을 배경으로 상반신 자화상을 배치한 구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흡사하다. 유화물감 팔레트와 동양화 모필 붓을 든 채 서양식 중절모를 쓰고 한복 두루마기를 입은 모습은 다소 불안정한 화가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봄처녀’는 이 작품과 쌍을 이루는 듯한 그림이다.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이 다소 평면적인 느낌이고 푸른색이 두드러지는 데 비해 ‘봄처녀’는 부드러운 명암으로 역동성과 양감이 강조되고 붉은색이 도드라져 보인다.
▶이쾌대, ‘봄처녀’, 캔버스에 유채, 91×60cm, 1940년대
민족의 불행 속에서 잊혀진 화가
뭐니뭐니 해도 이쾌대의 대표 걸작은 ‘군상(群像)–해방고지(解放告知)’ 시리즈. 총 네 점이 제작된 이 그림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크기 2m가 넘는 대작이다. “해방을 알린다”는 제목처럼 해방 소식을 전하는 사람과 이 소식을 듣고 반응하는 다양한 인물상이 역동적으로 표현된 작품이다.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을 역임한 미술사학자 김영나 서울대 명예교수는 저서 <1945년 이후 한국 현대미술>에서 “이들 군상은 한국 서양화의 짧은 역사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장대한 역사화라는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며 “초창기 유화에서 인물화들이 주로 한두 명의 인물을 그리는 습작류가 많았던 것을 상기하면 많은 인물을 통합시키는 드라마틱한 구성이나 인물들의 동작과 자세의 다양한 움직임, 감정 표현이 매우 감동적”이라고 서술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이쾌대의 흔적은 월북 이전까지다. 시대의 아픔, 분단의 한계를 넘어 이쾌대 같은 불행한 예술가의 기억을 복원해야 하는 숙제가 우리에게 남아있다.
이준희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겸임교수_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창작에서 전향해 몇 년간 큐레이터로 일했고, 미술 전문지 <월간미술>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까지 맡아 18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것보다 여전히 아티스트에 가까운 ‘미술인’으로 불리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