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표지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넷플릭스가 서비스되는 83개국에서 모두 1위에 오르면서 <오징어 게임>에 나온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구슬치기’ ‘달고나’ 등 우리 놀이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필자에게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란 아직도 약 30년 전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던 한 편의 소설 이미지로 강하게 남아 있다.
필자가 고교생이던 1990년대 초반 출간된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한마디로 충격 그 자체였다.
청와대 주도 아래 핵무기를 연구하던 천재 물리학자가 의문의 죽음을 맞고 미국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남북은 공동으로 핵개발을 진행한다. 일본이 우리나라와 전쟁을 선포하며 독도를 침공하자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과 마주하게 된 남과 북 최고 지도자들은 극비리에 회동해 핵무기를 일본으로 발사한다.
돌이켜보면 단순한 줄거리지만 행간에서 그때까지 사람들이 갖고 있던 남북 관계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뒤집어놓았다. 그때까지 국민 대다수는 북한이 주적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으나 소설을 이용해 남북이 협력하도록 만들고 더 큰 외부의 적은 일본이라고 공표한 셈이다.
이 소설에 충격을 받은 것은 필자뿐만이 아니었다. 출간 1년 만에 300만 부가 팔릴 정도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출판 업계는 당시 최고 판매 부수를 기록한 이 책에 대해 우리 출판 문화에 새 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남과 북이 정말 손을 잡는다면
수백만 명의 독자들은 실로 이 책을 계기로 일제강점기를 겪은 남과 북이 일본이라는 적 앞에서 손을 잡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1990년대 초 정서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남북의 분단 상황을 다룬 인기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서 축구 한일전이 시작되자 남과 북 등장 인물이 한마음 한뜻으로 응원하는 장면 역시 한반도의 역사적 메타포(은유)를 반영한 것이다.
남과 북이 정말로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가정은 주변국의 외교 전략에 대혼돈을 초래한다. 역사적으로 일본은 가급적 남과 북이 반목할 때 국익이 보장됐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가 전국을 강타하던 1993년의 10월 28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1994 미국 월드컵 최종 예선 일본 대 이라크 경기와 우리나라 대 북한의 경기는 왠지 모르게 이 소설 줄거리를 떠올리게 했다. 2위까지 월드컵 본선행 티켓이 주어지는 당시 여섯 개팀 리그에서 일본은 2위, 우리나라는 3위였고 최종전에서 우리나라가 북한에 큰 점수 차로 이기고 일본이 이라크와 비기거나 져야 우리나라가 2위가 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우리나라는 다행히 북한에 3:0으로 이겼고 일본은 이라크에 후반 종료 직전까지 2:1로 이기다가 종료 10초 전 동점골을 내주면서 우리나라가 극적으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다.
미국 역시 남북이 손을 잡는 작금의 상황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재 주한미군 기지는 명목상 북한을 겨냥한 것이지만 사실상 중국 견제용이라는 견해에 토를 달 사람은 많지 않다. 문재인정부 들어 한미 당국 간에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에 대한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됐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주한미군이 전작권 전환에 부정적 태도를 견지한다거나 전 주한미군사령관 빈센트 브룩스가 7월 미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 기고문에서 “북한을 동맹으로 만들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은 것은 미군의 이런 복잡한 심경이 반영됐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소설 <무궁화꽃이…>의 실사판 모습은?
군이 국가를 지배하는 통치 형태인 선군 체제를 구축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역시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 대해 언급한 것으로 전해진다. 국방력 강화가 다각도로 남북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생전에 인지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10월 11일 3대혁명전시관에서 열린 국방발전전람회 ‘자위-2021’ 기념연설에서 “우선 강해지고 봐야 한다”면서 국방력 강화를 핵심 국가 정책으로 천명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적은 전쟁 그 자체”라며 미국이나 남한은 북한의 주적이 아니라는 이례적인 발언까지 내놨다.
또한 “분명코 우리는 남조선을 겨냥해 국방력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 동족끼리 무장을 사용하는 끔찍한 역사는 다시는 되풀이되지 말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2018년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남북 상호간 일체의 적대 행위를 하지 않기로 한 약속에 대해 준수 의사를 재확인한 것일 뿐 아니라 ‘국방력은 여느 나라처럼 자위력 확보를 위해 강화할 것이지만 주적은 과거의 그들이 아니다’라고 명시해 종전선언에 대한 강한 의지를 밝힌 것으로 해석된다. 아울러 과거처럼 ‘서울 불바다’ 파문을 일으킨 장사정포 개발이나 미국 본토를 겨냥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에 열을 올릴 이유가 없어졌다는 의미로도 풀이된다.
만약 남북이 이러한 입장을 지속 견지한 가운데 일본의 독도 도발이 지금처럼 이어진다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실사판은 과연 어떤 모습이 될까?
김수한_ 헤럴드경제 기자(북한학 박사·한국기자협회 남북통일분과위원회 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