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나리’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할리우드 영화와 드라마에서 우리나라 사람은 악당이거나 존재감 없는 무명씨였다. 심지어 출연자들이 제대로 된 한국어를 구사하지 못해서 현실감도 떨어졌다. 영화 <백악관 최후의 날>에서는 북한 출신의 우리나라 경호원이 미국 대통령을 인질로 잡고 협박한다. <지.아이.조 2>에서는 북한이 핵보유국으로 나오고 북한군 장교들이 어설픈 연기를 펼친다.
그 밖의 작품들에서 우리나라 사람은 국적 불명의 존재감 없는 동양인이기 일쑤였다. 2018년 개봉한 <블랙 팬서>는 부산을 배경으로 촬영하면서도 극 중 등장인물이 어색한 한국어를 구사해 빈축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수년 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세상이 멈춘 줄 알았는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선택은 변화의 시작이라고 믿습니다.”
9월 20일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미래 세대와 문화를 위한 대통령 특별사절’ 자격으로 유엔 총회에서 한국어로 연설했다. 벌써 세 번째다. 이제 전 세계인들은 그들이 누군지 그들이 왜 연설에 나섰는지 묻지 않는다. 방탄소년단은 코로나19로 고통을 겪는 20·30세대에 대해 “코로나로 인한 ‘로스트 제너레이션’이 아니라 ‘웰컴 제너레이션’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린다”면서 그들을 위로했다. 멤버들은 또 유엔총회 회의장에서 시작해 청사 입구, 잔디 광장을 차례로 누비면서 ‘퍼미션 투 댄스(Permission to Dance)’를 열창했다.
넷플릭스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더 체어>는 한국계 배우 샌드라 오가 주연을 맡았다. 미국 명문대 영문학과장이 된 김지윤 교수는 학과 최초의 여성이자 유색인종 학과장이다. 그러나 김 교수는 나이든 교수들을 퇴출하라는 학교의 압박과 인문학을 사수하려는 완고한 교수들 사이에 끼어서 시달린다. 또 40대 싱글맘인 김 교수는 입양한 멕시코계 딸 주희, 연로한 아버지를 부양하면서 ‘썸’을 타는 동료 교수 빌 돕슨(제이 듀플라스)이 저지르는 사고도 수습해야 한다.
이 드라마는 미국 사회 소수인종 문제, 세대 차이, 페미니즘 논쟁, 몰락하는 인문학의 위기 등을 다룬다. 극 중 한국계 이민자 가정의 돌잔치 장면에서 우리네 돌잡이 풍습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 시리즈물의 공동 프로듀서로도 활약한 샌드라 오는 우리나라 사람의 언어와 풍습 등 리얼리티를 살리는데 크게 기여한다.
▶넷플릭스 ‘오징어게임’
▶넷플릭스 ‘김씨네 편의점’
세계 속 달라진 우리나라의 존재감
캐나다 국영방송 CBC가 제작한 시트콤 <김씨네 편의점>은 토론토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한국계 이민자 가정이 주인공이다. 최근 마지막 시리즈 시즌5가 넷플릭스에 공개됐다. 아시아계 이민자를 긍정적이고 유쾌하게 그린 드라마로 2016년 첫 방영 이후 인기를 얻었다. 드라마 속에서 주인공 김씨가 일본 차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건 우리나라가 일본에 지배당한 35년간의 아픈 역사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한국계 이민자가 주인공인 영화 <미나리>로 배우 윤여정이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은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국계 이민자 가정 출신의 정이삭 감독이 할리우드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은 결과다.
방탄소년단에 이어 최근 솔로 데뷔곡 ‘라리사(LALISA)’를 발표한 걸그룹 블랙핑크의 태국 출신 멤버 리사는 발매 첫 주 글로벌 유튜브 송 차트 1위를 차지했다. 특히 ‘라리사’ 뮤직비디오는 유튜브에서 24시간 동안 7360만 뷰를 기록하여 솔로 아티스트 세계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작품이 서비스되는 83개 국에서 정상을 차지하는 등 10월 6일 현재 전 세계 인기 순위는 13일째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이처럼 이유 있는 ‘한국인 열풍’이 부는 것은 달라진 우리나라의 위상과 더불어 유튜브나 넷플릭스 등 국경을 넘나드는 매체의 영향력이 한몫하고 있다. 또 한류로 대변되는 경쟁력 있는 콘텐츠가 이 같은 현상을 만들어가는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오광수 대중문화평론가(시인)_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오랫동안 문화 분야에서 기자로 일했다. 저서로는 시집 <이제와서 사랑을 말하는 건 미친 짓이야>, 에세이집 <낭만광대 전성시대> 등이 있다. 현재는 문화현장에서 일하면서 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클래식 음악계도 ‘월드 스타’ 배출 기대
대중문화 속에서만 우리나라 사람의 위상이 달라진 것이 아니다. 조성진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젊은 피아니스트다. 클래식의 본고장인 유럽은 물론 이웃나라 일본에서도 조성진은 스타 중의 스타다. 일본의 클래식 음악 잡지 <월간 쇼팽> 최근호는 조성진을 인터뷰 하면서 “압도적인 재능과 타고난 음악성을 지닌 현세대의 가장 뛰어난 재능”이라고 격찬했다.
최근 막을 내린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거 입상하면서 세계인들을 놀라게 했다. 부소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피아니스트 박재홍과 김도현이 나란히 1, 2위를 차지했다. 피아니스트 백건우도 1969년 이 콩쿠르에 입상해 세계 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2021년 5월 열렸던 몬트리올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는 피아니스트 김수연이 1위의 영광을 안았다. 프라하 봄 국제 음악 콩쿠르의 현악사중주에서 아레테 스트링 콰르텟이 1위를, 피아노 부문에서 피아니스트 이동하와 이재영이 1, 2위를 차지했다.
10월에 열리는 쇼팽 콩쿠르에는 우리나라 사람 연주자 7명이 나란히 본선에 올랐다. 2015년 조성진이 우리나라 사람 최초로 우승한 데 이어 또다시 대형 스타 탄생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