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린 서울김장문화제에서 참가자들이 배추를 버무리고 있다.│한겨레
21년 전인 2000년 가족 4인 기준 김장 비용은 얼마였을까? 요즘 물가 수준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10만 원이었다. 2010년 25만 원으로 뛰어오른 김장 비용은 2020년 30만 원으로 앞자리 숫자가 달라졌다. 매년 10월이면 언론에는 ‘올해 김장 비용’이 보도된다. 각국의 적정 환율을 가늠하는 ‘빅맥지수’가 있듯이 우리나라의 장바구니 물가상승률을 체감하는 지표는 ‘김장지수’다.
“김장은 하늘이 도와야 한다”는 말이 있지만 시골에서는 배추와 무 뽑는 날이 바로 김장하는 날이다. 절기로는 입동과 대설 사이 첫눈이 온다는 소설(11월 22일)이 적기다. 가을걷이한 붉은 고추를 볕에 말려 방앗간에서 빻는 등 김장 재료를 준비하려면 10월 하순부터 움직여야 한다.
된서리가 내릴 무렵이면 거실에서, 동네 어귀에서 삼삼오오 모여 한 아름 이야기꽃을 피우게 해주는 김장. 김치를 담가 나눠 먹는 문화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2013년 등재)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세계유산은 문화유산·자연유산·복합유산으로 나뉘는데 일반적으로 사람이 옮길 수 없는 크기의 부동산이 그 대상이다. 그중 무형문화유산은 한 공동체가 세대를 거쳐 재창조한 각종 지식과 기술, 관습, 문화적 표현을 아우른다. 그러기에 김치 자체가 아니라 김장 문화가 세계유산에 오른 것이다.
▶서울김장문화제에 참가한 한 어린이가 손수 담근 김치를 들어 보이고 있다. │ 한겨레
한데 모여 빚는 어울림의 미학
사전적으로 김장은 우리나라 사람이 긴 겨울 밥상에 올릴 저장용 채소를 입동 전에 많이 담가 두는 일이다. 김장 문화는 계절의 변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우리나라 사람의 지혜와 혼을 담고 있다. 기후와 지리가 다른 각 지역의 경험이 오랜 기간 숙성된 김치는 지역별로도 가정별로도 재료와 맛이 다른데 김치를 담그는 문화는 어디나 같다.
김장 문화의 중심에는 바로 사람이 있다. 한 해 공들여 수확한 재료를 마당에서 한데 버무려 사계절의 맛을 조화롭게 버무려 내는 것처럼 평소 보기 힘든 가족과 이웃 역시 김치를 담글 때만큼은 한데 모여 어울림의 미학을 빚어낸다. 김장은 겨울에 앞서 치르는 우리나라 사람의 성스러운 의식과 같다. 품앗이로 담근 김치는 서로 나눠 가지며 공동체 구성원의 유대감은 더욱 강화된다. 수 세기에 걸쳐 김장을 담가 오며 전 국민이 전수자인 문화유산이 과연 전 세계에 존재할까?
문헌에 처음 등장한 김장의 기록은 고려시대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는 “무를 소금에 절여 구동지(겨울 석 달)를 대비한다”는 구절이 있고 채소 가공품을 저장하는 요물고(왕실의 재정을 관장한 관청) 관련 기록도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 작성된 <동국세시기>에는 “가정의 1년 계획으로 봄 장 담그기와 겨울 김장이 중요하다”란 대목이, 조선 후기 가사집 <농가월령가> 10월령에는 “무 배추 캐어 들여 김장하오리다…”란 대목이 나온다.
사실 고려시대 김치는 오늘날과는 사뭇 달랐다. 삼국시대에 단지 채소를 보관하려고 소금에 절여 발효 음식으로 만들었던 김치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뒤 고추가 들어오면서 고춧가루가 첨가됐고 그 뒤 감칠맛을 더하는 젓갈이 더해져 맛이 한층 좋아졌다.
김장 체험, 맛보기 등 다채로운 행사
서울시는 김장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기념해 2014년부터 매년 11월 첫째 주 금·토·일요일에 서울김장문화제를 연다. 김장 문화로 전통과 현대를 잇고 세계인이 함께 어울리는 나눔의 장으로 기획한 행사다. 시민이 참여하는 김장 나눔, 외국인 김장 체험, 김장 김치 맛보기 등 다채로운 행사가 마련돼 있다.
11월까지 기다리기 힘들다면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뮤지엄 김치간’을 방문하는 것도 좋다. 이곳은 풀무원이 운영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김치박물관이다. 2006년 미국 잡지 <헬스>가 김치를 세계 5대 건강식품으로 선정하며 국외에 널리 알려진 ‘뮤지엄 김치간’은 2015년
이 뽑은 세계 11대 음식박물관으로 선정됐다. 건물 6층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헌정방이 있는데 김장 문화와 근대 김장 풍경, 김치 아카이브를 관람할 수 있다.
2021년 가족 4인 기준 김장 비용은 얼마나 될까? 비용을 예측하려다 보니 문득 주변에 김장 담그는 집이 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주문 김치의 보편화, 저염분 식생활로 변화, 김치 냉장고의 등장으로 직접 김장할 기능적 이유가 사라졌다. 더구나 코로나19로 모임 자체도 어렵다.
그래도 올해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허용하는 범위에서 가족끼리 모여 김장 문화라는 세계유산의 가치를 되새김하면 어떨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육에 갓 담근 배추김치를 얹어 전하는 그 옛날 어머니의 손맛에서 일상의 시름을 잠시 잊을 수 있다면 추억 한 점에 돈이 대수인가? 겨우내 먹을 김치는 덤이다.
김정필 <한겨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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