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시·지리·인화

2021.10.04 최신호 보기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9월 2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 본부에서 열린 제76차 유엔 총회 지속가능 발전목표 고위급 회의(SDG 모멘트) 개회 세션에서 발언을 마치고 연단을 내려오고 있다.│청와대

맹자에 ‘천시불여지리, 지리불여인화’(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라 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갖춰야 할 중요한 요건 세 가지로 천시, 지리, 인화가 있는데 그 중 인화가 으뜸, 지리가 버금, 천시가 그 다음이라는 얘기다.
오늘날 외교전이란 총칼 없는 전쟁과 같다. 문재인 대통령 내외가 세계적 팝스타로 떠오른 방탄소년단(BTS)과 함께 참가한 제76차 유엔 총회에서 펼친 외교전은 가히 천시, 지리, 인화가 절묘하게 조합된 승리라 해도 지나칠 게 없을 정도였다.
문 대통령은 9월 19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 도착해 21일까지 뉴욕에 머물렀다. 공교롭게도 2018년 평양정상회담에서 남북이 합의한 평양선언 3주년이 되는 날 유엔 총회 참석차 미국행을 택했고 마침 2021년은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한 지 30주년이 되는 해였다.
9월 20일에는 문 대통령이 ‘미래세대와 문화를 위한 대통령 특사’로 임명한 BTS와 함께 유엔 가입국 정상을 대표하는 유일한 정상 참석자로 ‘지속가능 발전목표 고위급 회의(SDG 모멘트)’ 행사에 참여해 코로나19 극복과 기후변화 대응 등 인류의 미래를 위한 국제사회의 연대 필요성을 역설했다.
2020년 시작된 SDG 모멘트 1차 화상 회의에서는 21개국 정상들이 참여한 가운데 에르나 솔베르그 노르웨이 총리가 회원국 대표 자격으로 발언했고 2021년 2차 화상 회의에서는 문 대통령이 유일하게 직접 참석해 대표발언을 맡았다.

종전선언 둘러싼 평화의 기류
빈곤과 기아 종식, 모든 사람의 복지 추구, 공평한 교육 보장, 국가간 불평등 완화, 기후변화 공동 대응 등 인류 보편의 목표를 두고 각국이 머리를 맞대는 무대에 문 대통령과 BTS가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의 국가적 위상이 높아졌음을 시사한다. 뿐만 아니라 이를 계기로 BTS는 유엔 총회장을 무대로 ‘퍼미션투댄스’(Permission To Dance) 뮤직비디오 영상을 찍었는데 이는 세계적인 대가수 마이클 잭슨도 해보지 못한 전례 없는 일로 회자됐다. 또한 BTS가 현장에서 제작한 뮤직비디오는 게시 하루 만에 조회 수 1000만 회를 넘기는 등 세계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마침 SDG 모멘트 행사가 열린 날 세계지식재산기구(WIPO)가 발표한 ‘2021년 글로벌 혁신지수’에서 우리나라가 역대 최고인 5위에 오른 것 또한 우연이 아닌 ‘천시’로 여겨졌다. 유엔 총회 1주일여 전인 9월 15일 우리나라가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개발에 성공한 세계 7번째 나라에 등극한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문 대통령은 9월 21일 이번 유엔 외교전의 하이라이트인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남·북·미 또는 남·북·미·중이 한반도 종전선언을 할 것을 제안했다. 문 대통령은 “종전선언은 한반도에서 화해와 협력의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라면서 종전선언을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를 여는 문”이라고 호소했다.
문 대통령의 재임 중 마지막 승부수로 여겨지는 종전선언 제안에 대해 일각에선 회의적 시각이 없지 않았으나 북측에서 즉각 긍정적 화답이 나온 것 또한 예상 외의 놀라운 결과였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여동생으로 김 위원장의 대외적 메시지 창구 역할을 하는 김여정 북한 조선노동당 부부장은 문 대통령 종전선언 제안 사흘 뒤인 9월 24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발표한 담화에서 “종전선언은 나쁘지 않다”며 즉각 화답했다.
김 부부장은 “장기간 지속되고 있는 조선반도의 불안정한 정전 상태를 물리적으로 끝장내고 상대방에 대한 적대시를 철회한다는 의미에서 종전선언은 흥미 있는 제안이고 좋은 발상”이라고 밝혔다.
이어 하루 뒤인 25일 다시 담화를 발표하고 “의의 있는 종전이 때를 잃지 않고 선언되는 것은 물론 북남공동연락사무소의 재설치, 북남수뇌상봉(정상회담)과 같은 관계 개선의 여러 문제도 건설적 논의를 거쳐 이른 시일 내에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한 발 더 나아갔다.

한반도 평화를 실현할 절호의 기회
문 대통령 임기 후반기에 다시 한 번 한반도 평화를 실현할 절호의 기회가 다가 온 셈이다. 이러한 기회는 절로 이뤄진 게 아니라 강한 의지를 갖고 목표를 향해 뚜벅뚜벅 일관되게 전진한 문 대통령이 직접 일군 성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흔히 통일은 남북 뿐만 아니라 주변국의 이해관계도 맞아떨어져야 이룰 수 있는 어려운 과업이라고 이야기한다. 미국은 국무부 차원에서 이미 여러 차례 북한에 대해 적대적 의도가 없으며 대화와 외교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며 대화를 촉구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도 남북대화를 지지하는 입장이다. 중국 외교부는 문 대통령 유엔 기조연설 다음 날인 9월 22일 “한국의 종전 노력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 역시 25일 유엔 총회에서 남북대화 지지 입장과 함께 미국의 건설적 역할을 주문했다.
물론, 여전히 각국의 이해관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아 주변국의 태도를 낙관적으로만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다만 표면적으로 주변국들이 협조하는 여건이 조성된 것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호기임이 분명하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천시와 지리는 갖춰지고 있다. 여기에 한반도 평화에 대한 우리 국민과 세계인의 염원이 인화의 바탕이 될 것이다.

김수한 헤럴드경제 기자 (북한학 박사·한국기자협회 남북통일분과위원회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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