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 ‘골목안’, 캔버스에 유채, 80.3×53cm, 1950년대
인상주의 화풍 그림은 누구에게나 인기가 높다. 어렵지 않은 주제와 밝은 색채, 부담 없는 친숙한 이미지 때문이다. 국가, 인종,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사랑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상주의 미술은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과도기 양식. 인상주의가 유행하기 이전 18~19세기 초 낭만주의나 (신)고전주의, 리얼리즘 미술은 내용이 너무 거창했다. 프랑스 혁명과 카메라 발명 이후 정치나 역사에 관한 거대 담론이 인상주의 이전 그림의 주제였다. 어떤 면에선 종교에 사로잡혔던 중세시대 세계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인상주의 이후 20세기 초에 등장한 입체파, 야수파, 미래파 그림은 너무 어려웠다. 표현방식이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파격적이었다. 그래서 일반인에게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피카소, 마티스, 보치오니 같은 작가의 작품이 여기에 해당한다.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손꼽히는 박수근 그림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박수근을 인상주의 화가라고 규정할 순 없다. 그럼에도 여러 면에서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다. 일례로 박수근이 인상주의 화가 밀레를 동경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어린 시절 밀레의 작품 ‘만종’ 복제품을 본 박수근은 자신도 밀레처럼 위대한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단다. 도시 문명을 벗어나 시골 농촌마을 바르비죵에서 농부의 삶을 그렸던 밀레처럼 박수근도 우리나라의 농촌과 소박한 서민의 삶을 화폭에 담았다. 인상주의 미술처럼 친숙하고 어렵지 않다.
▶박수근, ‘절구질 하는 여인’, 캔버스에 유채, 130×97cm, 1954
국민화가 박수근의 일생
박수근은 1914년 강원도 산골마을 양구에서 육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길 좋아했지만 제대로 된 미술교육을 받지 못했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양구공립보통학교(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줄곧 독학으로 그림공부를 했다. 당시 부잣집 출신 화가들은 일본이나 심지어 프랑스로 유학 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사정이 그렇지 못한 박수근이 화가로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하나. ‘조선미술전람회(선전)’(해방 이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로 이름이 바뀐다)에 출품해서 상을 받는 것이었다. 1932년 18세 때 제11회 선전에 처음 출품해 입선했다. 사진으로만 남아있는 그때 그림은 기와집을 배경으로 빨랫줄에 옷을 걸고 있는 여인과 그 곁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모습을 그린 사실적 풍경화다.
1940년 스물여섯 살 박수근은 부잣집 맏딸로 춘천여자고등학교에 다닌 재원이자 기독교 신자인 김복순과 결혼했다. 그리고 평생 처음으로 제대로 된 직장생활을 잠시 했다. 평양에 있던 평안남도 도청에서. 이때 아내를 모델로 한 <맷돌질하는 여인>, <모자(母子)>등을 그렸다. 이후 8·15해방과 6·25전쟁으로 이어지는 혼란한 상황에서 홀로 남한으로 내려오면서 가족과 헤어졌고 우여곡절 끝에 다시 가족을 만나 서울 창신동에 정착했다.
이때부터 미8군에서 미군 병사 초상화를 그리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며 작품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같은 미군 부대에 근무했던 소설가 박완서의 소설 <나목(裸木)>에 당시 박수근의 삶과 상황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평생 변변한 직업 없이 오직 그림만 그린 전업작가로서 삶은 팍팍했고 녹록지 않았다. 수입이라곤 당시 서울에 있던 유일한 화랑인 반도화랑에서 가끔씩 팔리는 그림값이 전부였다. 이때 박수근 그림의 가치를 먼저 알아보고 작품을 구입한 사람은 외국인들이었다. 특히 미국 외교관 부인인 마가렛 밀러 여사는 박수근 그림의 열렬한 팬이었다. 미국으로 돌아간 밀러 부인은 박수근과 편지를 여러 차례 주고받았고 그림도 수십 점 구입했다. 둘 사이 오간 편지는 지금 강원도 양구군에 있는 박수근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박수근, ‘나무와 두 여인’, 하드보드에 유채, 16.5×19cm, 1964
내용과 형식에서 한국적 정서 담아
박수근 그림은 내용과 형식면에서 모두 한국적인 정서를 짙게 담고 있다. 주제는 크게 세 가지. 첫째는 집 자체를 그리거나 집들이 있는 골목길이고 둘째는 여인의 일상 모습이다. 머리에 짐을 얹은 여인, 절구질하는 여인, 빨래하는 여인, 아기를 업은 여인, 길 위에서 물건을 파는 여인을 즐겨 그렸다. 이 시리즈가 가장 대표적이고 작품 수도 많다.
셋째는 앙상한 나뭇가지로 표현된 ‘나목’과 어울린 인물화다. 주로 말년작에 해당한다. 더불어 형식적으론 두터운 마티에르(표면의 질감)가 주목된다. 특유의 질감으로 표현된 그림표면은 마치 이끼 낀 화강암처럼 보인다. 이런 요소가 바로 박수근을 가장 한국적인 정서와 미감을 표현한 작가로 각인시킨 것이다. 1965년 5월, 간경화가 악화돼 결국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52세가 되던 해였다.
박수근은 이중섭, 김환기와 함께 우리나라 사람의 심성을 잘 표현한 작가로 유명하다. 공교롭게 이들 작품은 지금 우리나라 미술시장에서 가장 비싼 가격으로 거래된다. 그림값이 예술성과 반듯이 비례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사후에라도 이런 식으로 인정받는 것은 한편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이준희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겸임교수_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창작에서 전향해 몇 년간 큐레이터로 일했고, 미술 전문지 <월간미술>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까지 맡아 18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것보다 여전히 아티스트에 가까운 ‘미술인’으로 불리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