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간판 오디션 프로그램 <아메리카 갓 탤런트>에 출현한 세계태권도연맹 산하 시범단│유튜브 화면 갈무리
“Peace is more precious than triumph.”
흔히 이 문구는 ‘평화(平和)는 개선(凱旋)보다 귀하다’는 말로 번역된다. ‘허울 좋은 승리보다 평화가 낫다’는 뜻이다. 전쟁을 벌인 양쪽에게 모두 상처뿐인 승리보다는 전쟁을 피해 지킨 평화가 더 값지다는 것이다.
이 문구는 ‘전쟁이냐, 평화냐’는 질문이 여전히 실존적인 한반도에서 더욱 가치를 발한다. 지금 현재 상황은 비관적이지도 낙관적이지도 않지만 평화를 염원하는 작은 목소리가 강물이 돼 남북관계 운명의 물줄기를 바꿔나갈 것이다.
최근 전 세계인이 지켜보는 미국의 인기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 문구가 매회 주목받고 있다.
세계태권도연맹(WT) 시범단이 미국 NBC의 ‘아메리카 갓 탤런트(America’s Got Talent)’ 결승에 진출했다. 세계적 재능을 가진 경쟁 상대를 줄줄이 물리치고 우승 왕관을 쓰기 직전이다.
태권 청년들이 전하는 평화 메시지
대한의 태권 청년들이 신기에 가까운 동작을 펼친다. 수준 높은 태권도 실력에 전율하는 미국인 심사위원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요즘 말로 ‘가슴이 웅장해진다’. 공연 말미에 WT 시범단은 ‘Peace is more precious than triumph’가 새겨진 큰 플래카드를 펼친다. 뛰어난 공연에 인류의 마음을 뒤흔드는 감동 메시지까지 놓치지 않았다.
특히 극강의 기량을 선보인 WT 시범단이 이 문구를 펼쳐보여 더 긴 여운을 남겼다.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4세기 고대 로마 군사전략가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의 문구를 몸소 실천하면서도 가슴 속에는 ‘평화는 개선보다 귀하다’는 이상을 품은 모습이다.
사실 이 문구는 꽤 유서가 깊은 표현이다. 경희대학교 설립자인 고 조영식 박사가 평생 염원했던 이상이다. 지금도 경희대 캠퍼스 내 각종 기념물에 새겨져 있다. 또한 그가 1982년 펴낸 책 제목이었다.
이 문구가 WT 시범단 공연에 나타난 것 역시 우연이 아니었다. 2004년 고 김운용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뒤를 이어 WT 총재에 취임한 조정원 총재가 고 조영식 박사의 장남이다. 조 총재는 재임 중 태권도에 내재된 평화의 철학을 재조명하는데 공을 들였다고 한다. 태권도와 조 박사의 평화론 사이에 그가 있었던 셈이다.
1921년생인 조 박사는 평북 운산 출신으로 일제시대 때는 학도병으로 징집당했고 1946년 월남해 6·25전쟁의 참상을 몸소 겪었다. 그는 대학 설립 이후 전쟁이 아닌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교육하는데 평생을 힘썼다고 한다. 그의 어록에 따르면 “학문은 평화를 위한 것”이었고 “평화는 개선보다 귀하다”는 그의 삶의 모토가 됐다.
남북에 찾아온 또 한 번의 기회 유엔총회
북한은 7월 문재인 대통령 퇴임까지 불과 10개월을 남겨둔 상황에서 다시 남북대화에 응해 다시 한 번 국면 변화가 예고됐다. 다만 북한이 8월 대북 선제타격 등의 시나리오로 구성된 한미연합훈련에 반발해 다시 연락을 끊어 대화 재개 시점은 오리무중인 상황이다.
그러나 북측의 내부 경제 회복, 코로나19 확산 대처 등을 위해 ‘남북 대화의 시간’은 문 대통령 임기 내 다시 찾아올 가능성이 크다. 북한의 반발로 불안정한 전망 속에서도 문 대통령은 뚜벅뚜벅 평화의 길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일단 9월 하순으로 예정된 유엔총회가 남북에겐 또 한 번의 기회로 남아 있다.
마침 WT 시범단은 9월 15일 ‘아메리카 갓 탤런트’ 결승전에서 총 10개팀 중 한 팀으로 우승에 도전한다. 세계 속 한국 그 자체인 WT 시범단은 유엔총회 직전 세계인들에게 다시 한 번 평화의 중요성을 환기할 기회를 맞이한다. 이어 9월 21일부터 30일까지 유엔총회가 열린다. 유엔총회가 시작되는 21일은 조 박사가 제창한 ‘국제 평화의 날’이다.
이를 전후해 남북이 조응한다면 세계가 주목하는 또 하나의 ‘빅이벤트’가 될 것이다. 조 박사가 뿌려두었던 평화의 씨앗이 어느새 실이 되어 9월의 어느 날을 향해 날줄과 씨줄을 엮어나가고 있다.
조 박사는 자신의 저서 <오토피아>에서 특정 시점의 시간과 공간적 배경을 ‘환류’, 그 환류에서 역사를 움직이는 주역을 ‘실체’라고 불렀다. 9월 유엔총회가 환류, 남북 정상이 실체가 되어 과연 역사를 움직여나갈 수 있을까?
김수한 헤럴드경제 기자 (북한학 박사·한국기자협회 남북통일분과위원회 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