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우리는 소중했던 친구인 한국 영화를 잊고 지냈습니다. 백신으로 일상을 되찾고 있는 이제는 잠시 멀어졌던 오랜 친구와 극장에서 다시 만나면 어떨까요? 마음백신 한국영화.”
최근 오랜만에 극장을 찾았다가 배우 정우성이 출연한 ‘마음백신 한국영화 접종 캠페인’을 보고 울컥했다. 진정성이 느껴지는 정우성의 표정 위로 생활고로 어려움을 겪는 주변 영화인들의 얼굴이 겹쳤다. 많은 영화인이 휴업 상태인 영화 현장을 떠나 물류센터 아르바이트나 배달업으로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런 사정을 잘 아는 정우성이기에 그의 호소에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정우성만 나선 게 아니다. 여름 극장가에 영화관을 떠난 관객들을 다시 불러모으기 위해 소위 ‘삼촌 배우’들이 맹활약하고 있다. 김윤석, 허준호, 조인성, 황정민, 차승원 등 중견 남자 배우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가 박스오피스 1~3위를 차지하면서 선전 중이다. 이들이 출연한 영화 <모가디슈>, <싱크홀>, <인질>은 코로나19로 개봉이 미뤄졌던 영화들이다. 공교롭게도 ‘오빠’보다 ‘삼촌’이 어울리는 중견 남자 배우가 이끌어가는 영화라는 공통점이 있다.
<모가디슈> <싱크홀> <인질>…
300만 명에 육박하는 관객을 동원한 영화 <모가디슈>(감독 류승완)에서는 김윤석, 허준호, 조인성이 활약한다. 1991년 소말리아 내전 당시 수도 모가디슈를 탈출하기 위해 손잡은 남북한 대사관 직원들의 악전고투를 그린 영화다. 김윤석(한신성 역)이 남한 대사를, 허준호(림용수 역)가 북한 대사역을 맡아 열연한다. 조인성은 삐딱하지만 속이 깊은 옛 국가안전기획부 요원 출신 참사관 강대진 역을 맡아 극을 이끌어간다. 김윤석은 무심하면서도 속이 따뜻한 연기로 극의 중심을 잡고 허준호는 신중하면서도 냉철한 판단력을 소유한 북한 대사로 한층 깊어진 연기력을 선보인다.
특히 이 영화는 최근 무장 세력 탈레반에게 점령 당한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하기 위해 아비규환을 이룬 카불 공항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주목받았다. 또 아프가니스탄에서 우리 정부의 활동을 도왔던 현지인 직원과 가족이 군 수송기로 이송되면서 영화 같은 감동이 이어지고 있다. 쿠데타에 성공한 반군을 피해 소말리아의 모가디슈 공항을 탈출하는 영화 속 내용이 30년 만에 재현된 것 같다.
2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코믹 재난 영화 <싱크홀>(감독 김지훈)에서는 차승원과 김성균의 연기 대결이 볼만하다. 서울에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룬 회사원 김성균(동원 역)은 이사 첫날부터 참견의 대마왕 차승원(만수 역)과 사사건건 부딪친다. 김성균은 집들이를 위해 직장 동료들을 초대하지만 새로 지은 빌라가 순식간에 싱크홀로 빨려 들어간다.
영화 <낙원의 밤>의 주인공으로 출연했지만 극장 개봉 대신 넷플릭스를 택해야 했던 차승원은 능글맞은 연기로 영화를 주도한다. 여기에 집들이에 왔던 이광수(김대리 역)와 인턴사원 김혜준(은주 역)의 감초 연기도 볼만하다. 다만 너무 오랫동안 창고에서 대기한 영화여서인지 역동적인 기획과 달리 화면의 흐름은 다소 지루하다.
코로나19 암흑기에 거둔 소중한 성과
가장 늦게 개봉해 100만 명 관객을 목표로 달리고 있는 리얼리티 액션스릴러 <인질>(감독 필감성)은 황정민으로 시작해 황정민으로 끝나는 영화다. 어느 날 새벽에 서울 한복판에서 대한민국 톱배우 황정민이 납치된다. 증거도 없고 목격자도 없다. 황정민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납치범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내용이다.
영화에서도 현실과 다를 바 없는 배우 황정민으로 등장해 숨 쉴 틈 없는 액션을 선보이는 황정민은 극장 부활을 위해 몸을 던진 검투사 같다. 인질범들은 대부분 뮤지컬 등에서 활약한 신예들이지만 연기력이 만만치 않다.
사제 총과 폭탄 제조를 담당하는 홍일점 이호정(샛별 역)을 비롯해 용의주도한 리더 김재범(최기완 역), 무자비한 2인자 류경수(염동훈 역), 황정민의 ‘찐 팬’인 정재원(용태 역), 거구인 이규원(고영록 역) 등이 실감 나는 연기로 영화의 긴장감을 높인다. 인질 황정민을 묶어놓고 “드루와. 그거 한번 해볼래요?”라고 요구하는 정재원의 연기는 섬뜩하다.
이들 영화의 관객 동원 숫자는 천만 영화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던 코로나19 이전과 비교하면 성에 안 차는 기록이다. 그러나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실행되는 와중에 방역수칙을 철저하게 준수하면서 거둔 기록이어서 더욱 소중하다.
정우성의 진심처럼 우리 영화가 부활해 극장이 관객으로 차고 넘치는 그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대해본다.
오광수 대중문화평론가(시인)_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오랫동안 문화 분야에서 기자로 일했다. 저서로는 시집 <이제와서 사랑을 말하는 건 미친 짓이야>, 에세이집 <낭만광대 전성시대> 등이 있다. 현재는 문화현장에서 일하면서 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