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소, ‘광명쇼핑센터’, 합판, 조명장치, 종이, 연필, 230×160×145cm, 2003/2006, 로댕갤러리 설치 장면
미술대학 학생들이나 현대미술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찾아보는, 아니면 꼭 봐야 하는 필독서가 있다. 인상적인 제목이다.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지음, 박이소 옮김, 현실문화). 1997년 번역돼 국내에 처음 소개된 책이다. 그동안 세 번에 걸쳐 개정판을 냈고 여전히 여러 미술대학에서 인기 교재로 활용되고 있다.
책 제목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는 이 책을 번역한 작가 박이소(1957~2004)의 삶과 예술을 대변하는 멋진 명제다. 우리는 어떤 예술가를 이해할 때 그릇된 선입견 때문에 제대로 된 평가를 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곤 한다. ‘요절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더 그렇다. 요절 작가에 대한 회고는 상투적인 고정관념을 떨쳐버리는 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박이소가 그렇다. 박이소는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지만 우리나라 현대미술계에 남긴 영향력은 매우 크다. 창작 외에도 번역과 집필, 기획, 교육 등 다방면에서 전방위적으로 활동했다. 소리 없이 우리 미술계를 움직인 인물이었다.
▶박이소, ‘베니스 비엔날레’, 각목, 대야, 물, 타일, 자갈, 콘크리트, 161×290×230cm, 2003‘ 제50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대표 작가로 참여한 박이소가 각목으로 만든 엉성한 구조물. 이 각목에는 26개의 국가관 건물과 베니스 비엔날레 본 전시가 열리는 아스날 전시관이 조각돼 있다.
철호로 태어나 ‘모·이소’로 살다간 작가
2004년 4월 26일, 박이소는 작업실 소파에 깊숙이 파묻힌 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두어 달이 지나서야 그의 죽음이 미술계에 알려졌다. 세상과 고립을 스스로 원했던 작가는 그렇게 떠났다. 이런 식의 사라짐은 그가 생전에 꿈꿨던 ‘완벽한 독거(獨居)’의 완성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의 부재에 관한 소문은 소리 없이 번지는 안개처럼 조용히 퍼져나갔다. 그 충격과 허망함으로 우리 미술계는 한동안 어수선했다. 사후 2년 뒤 2006년 3월엔 지금은 없어진 로댕갤러리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전시 제목은 ‘탈속의 코미디: 박이소 유작전’이었다.
1957년 부산에서 태어난 작가의 본명은 박철호. 홍익대 서양화과와 미국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 대학원을 졸업했다. 뉴욕에서 활동하던 1984년, 그는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스스로 버렸다. 철호라는 이름 대신 ‘아무개’ 즉 익명을 뜻하는 ‘모(某)’라는 이름으로 약 10년을 살았다. 우리나라로 돌아온 박모는 다시 ‘이소(異素)’라는 낯선 이름으로 살았다.
뉴욕 시절 박모의 활동은 작가보다 기획자이자 문화 운동가로서 두드러졌다. ‘마이너 인저리(Minor Injury)’라는 비영리 대안공간을 설립하고 운영하면서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제3세계 국가 작가나 미국 주류 문화에서 소외된 주변부 작가들을 결집시키고 그들의 작품을 널리 알렸다.
1995년 귀국과 동시에 SADI(Samsung Art&Design Institute) 드로잉 컨셉트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이때 “자유를 근본으로 하는 미술대학에서 교수라는 명칭을 쓰지 말자”고 주장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SADI 교수직을 그만두고 1999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생활을 하며 개인 작업에 몰두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약 10년 동안 〈광주 비엔날레〉(1997), 〈타이베이 비엔날레〉(1998), 〈요코하마 트리엔날레〉(2001), 〈베니스 비엔날레〉(2003), 〈부산 비엔날레〉(2005) 같은 국내외 주요 비엔날레에 참여했다.
▶박모, ‘역사’(왼쪽), ‘전통’(오른쪽), 캔버스에 아크릴릭, 161×111cm, 1989~1990
▶박모, ‘동양적’, ‘비전통적’, ‘자본=창의력’, 종이에 혼합 재료, 1991/1988/1986
현대미술의 권위를 향한 냉소와 비판
그는 생전에 이런 작업 노트를 남겼다. “내게 있어 미술작품 제작이란 이미지와 물질을 사용해 모든 것에 대한 나의 끝없는 의심을 정당화하는 과정이 아닐까 한다. 그것은 기존 의미와 영역들 사이에 펼쳐 있는 광대하고도 끝없는 ‘틈’을 거꾸로 여행하려는 것과도 같다. 물론 위에 언급한 생각들을 작품 속에 담으려고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관객이 명료하게 이해해주기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뒤죽박죽인 느낌, 애증의 양면성, 주저함이나 일관성 없는 것이 인간의 참모습에 가까우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과 작품을 보면 그를 특정 장르 작가로 규정하기 어렵다. 형식적으로도 드로잉과 회화, 설치 영역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그나마 ‘개념미술가’라는 호칭이 유효할지 모르겠다. 특히 각목, 베니어합판, 비닐, 골판지, 시멘트, 스티로폼처럼 싸구려 재료를 즐겨 사용했는데 자신의 작업이 헐렁하고 허접하고 조잡하고 엉성하고 어눌한 것처럼 보이고자 의도했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이 지닌 고상함과 권위를 향한 냉소와 비판을 위한 전략이었다. 박이소가 남긴 작품엔 진지한 표정으로 심각하게 던진 농담처럼 수준 높은 유머가 담겨 있다.
이준희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겸임교수_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창작에서 전향해 몇 년간 큐레이터로 일했고, 미술 전문지 <월간미술>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까지 맡아 18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것보다 여전히 아티스트에 가까운 ‘미술인’으로 불리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