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이 8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에서 홍범도 장군 묘역을 참배하고 있다.│문화체육관광부
정부의 독립운동가 발굴 노력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100년 전인 1921년 매서운 겨울 추위와 싸우며 우수리강을 건너 러시아로 들어갔던 홍범도 장군. 그의 유해가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고국으로 돌아와 8월 18일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됐다. 홍범도 장군에게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이에 앞서 2년 전인 2019년에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3·1운동을 상징하는 여성 독립운동가인 유관순 열사에게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2017년 5월 출범한 문재인정부는 100대 국정과제의 하나로 ‘국가를 위한 헌신을 잊지 않고 보답하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광복절을 맞아 애국지사 및 독립유공자 후손을 청와대에 초청한 자리에서 “제대로 된 보훈은 나라를 위한 모든 희생을 끝까지 찾아내 기억하고 그들에게 널리 보답하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임을 천명했다.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분들이 잊히지 않도록 예우하는 국가 책임을 실현하겠다는 정책 방향은 적극적인 보훈 정책의 추진으로 현실화됐다. 어릴 적부터 역사 교과서를 통해 그 활약을 익히 알고 있는 홍범도와 유관순에 대한 대한민국장 추서에는 단순히 두 영웅에 대한 추앙의 의미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운동가를 찾아내 합당한 예우를 하겠다는 보훈 정책 의지가 담겨 있기도 하다.
여성 독립유공자 포상 해마다 크게 늘어
문재인정부의 독립운동가 발굴 노력은 독립유공자에 대한 포상 확대로 이어졌다. 이를 위해 독립유공자 포상 심사 기준을 실질적 독립운동 활동에 맞춰 개선했다. 종전에는 옥고를 최소한 3개월 이상 치러야 독립유공자로 포상했다. 이 기준을 완화해 독립운동을 한 사실이 확인되면 3개월 이하로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들도 포상을 받게 됐다. 이러한 심사 기준 개선은 그동안 소외됐던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를 발굴하는 성과를 낳았다.
사회 활동이 여의치 않았던 상황 속에서 독립운동 전면에 나서지 않았지만 실질적 역할을 했던 여성 독립운동가에게 3개월 이상의 옥고라는 종전의 포상 기준은 너무나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관련 인물의 일기, 회고록과 수기, 독립운동 참여 가족의 자료 등을 통해 독립운동 사실이 입증되면서 포상받도록 했다. 그 결과 2017년 불과 10명을 포상하는 데 그쳤던 여성 독립유공자 포상이 2018년 60명, 2019년 113명으로 매년 크게 늘었다.
2020년 3월 1일 3·1절 제101주년 기념식이 서울 배화여고에서 열렸다. 그로부터 100년 전인 1920년 3월 1일에는 배화여고 전신인 배화학당 학생 약 40명이 새벽에 학교 뒷산인 필운대에 올라가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중 24명이 서대문감옥에 갇혔고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24명 중 공적이 확인된 18명에 대해 2018년과 2019년에 대통령표창이 수여됐다. 그중 한 사람인 김마리아는 2·8독립선언서를 국내에 갖고 들어온 일본 유학생 김마리아와 동명이인이었다. 해방 이후 배화학당 학생이던 18세 김마리아의 행적은 잊혔지만 서대문감옥에서 찍은 앳된 사진 한 장은 남았다. 그보다 11살이 많은 일본 유학생 김마리아는 교과서에 실리는 대표 여성 독립운동가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면서 배화학당 학생이던 김마리아가 남긴 사진이 일본 유학생이던 김마리아가 1919년에 감옥에서 찍은 사진으로 인용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두 사람의 나이를 따져보면 이상하다는 의심을 해야 했지만 그런 사람은 많지 않았다. 2018년 배화학당 학생 김마리아가 대통령표창을 받으면서 그가 감옥에서 남긴 한 장의 사진도 마침내 제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독립운동가의 이름
독립이 되고 나라를 건설하면 우선 해야 하는 일이 독립운동가를 선양하는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후 이듬해 독립유공자 서훈 제도가 마련됐다. 그해 광복절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운동 유공자로 자신과 이시영 부통령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이승만정부 내내 독립운동 유공자는 단 두 사람뿐이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들어선 군사정부가 독립운동 유공자 서훈 제도를 재가동했지만 그것은 알려진 독립운동가를 서훈해 정권의 취약한 정당성을 보완하려는 조치에 불과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독립운동가로서 예우받지 못한 많은 ‘김마리아’가 세상을 떴다.
해방 직후 정부는 독립운동가 선양을 외면했지만 마을에서, 지역에서 독립운동의 역사를 보존하고 독립운동가를 선양하기 위해 만든 책자들을 최근 본 적이 있다. 그 속에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독립운동 역사와 독립운동가 이름이 담겨 있었다. 그분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예우하는 것, 문재인정부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냈지만 다음 정부의 몫으로 남겨진 일이다.
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