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세잔, ‘생트 빅투아르 산’, 캔버스에 유화, 57.2×97.2cm, 1902~1906,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폴 세잔(1839~1906)은 인문학적 사고에 능통한 인물이었다. 그것은 그가 학창 시절 습득한 풍부한 인문학적 소양과 관계가 있다. 22세 때 법학 공부를 중단하고 미술의 길로 들어선 뒤 67세로 생을 다할 때까지 세잔은 사춘기 시절 갈고닦은 인문학 지식을 한시도 멀리하지 않았다. 청소년기에 만난 문사철(文史哲)은 세잔의 사고의 세계를 풍요롭게 살찌웠으며 훗날 그가 현대미술이라 불리는 신대륙을 가장 먼저 발견하는 바탕이 됐다.
체계적이고 우수한 인문학 교육은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세잔의 성취 욕구를 수면 위로 힘차게 밀어 올렸다. 화가가 돼 그림으로 진리를 일깨우겠다는 욕망은 인문학 지식 덕분에 논리와 상상의 양 날개를 장착해 현대미술이라는 전대미문의 신천지를 향해 이륙할 준비에 들어갔다. 대학 입학 무렵 세잔은 희곡 대본을 직접 쓸 정도로 상당한 문학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실제로 세잔이 육필로 기록한 다수의 시와 희곡 습작(習作)이 현재까지 전해진다.
세잔의 회화 이론은 3대 축으로 이뤄져 있다. 그의 회화론은 인문학적 사유의 세계와 맞닿아 있다. 일반인에게 익숙한 ‘대상의 단순화’와 ‘다시점(多視點) 관찰법’은 말할 것도 없고 ‘색채와 형태 동일성의 법칙’도 논리 정연한 철학적인 고찰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결코 정립될 수 없다는 점에서다.
색채와 형태 동일성의 법칙
특히 세잔이 ‘색채와 형태 동일성의 법칙’을 독창적인 회화 원리로 창안한 경위를 뜯어보면 그의 사고의 폭과 깊이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 실감하고도 남는다. 색에 대한 세잔의 사고를 본인의 목소리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자연의 모든 것은 색깔을 갖고 있기에 색깔로 형태를 나타낼 수 있다는 점은 이치상 자연스럽다. 즉 색과 형태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색이 형태요, 형태가 색이다. 더욱 신기한 것은 색칠 작업을 진행할수록 형태도 차츰 모습을 갖춘다는 것이다. 색이 풍요로워질수록 형태도 탐스러워지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상반되는 색의 병치와 둘 이상의 색이 서로 연결돼 사이좋게 얽혀 있는 모습, 즉 색의 대비와 색의 조화는 형태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변수다.”
색의 특성을 존재론적으로 들여다보고 분석한 것도 놀랍지만 그 결과에서 형태의 근원적 본질을 추출했다는 점에서 철학적 사고의 연금술사라 할 수 있다.
세잔의 이 같은 인문학적 사유는 사실(寫實)과 재현의 시대가 끝나고 과학적이고 이론적인 패러다임의 시대를 예고한 현대미술이 발아하는 데 기폭제 역할을 했다. 세잔은 색으로 형태를 표현했고 색으로 원근법을 나타냈고 색으로 입체감을 창조했다.
세잔의 고향은 프랑스 남부 부슈뒤론주의 엑상프로방스다. 30년 가까이 고향 마을의 산을 탐구하며 자연의 본질 규명에 사활을 건 세잔은 90점이 넘는 ‘생트 빅투아르 산’ 연작을 남겼다.
세잔은 세상 모든 것의 원형을 추적하면 원과 원통, 원뿔로 귀착된다는 원형 동일성의 법칙을 ‘생트 빅투아르 산’ 시리즈에도 적용했다. 높이와 크기와 산세가 다르더라도 결국 ‘산은 산’일 뿐, 언제 어디서나 변하지 않는 산의 원초적 모습만이 세잔의 관심사였다. 다양한 모습을 한 산의 공통분모는 무엇일까? 산을 기하학적으로 최소 분해하면 삼각형 모양으로 압축된다. 우리가 산, 하면 떠올리는 형상이다. 집은 오각형 또는 사각형, 나무와 숲은 원형이나 사각형, 사다리꼴 혹은 마름모, 역사다리꼴로 형태상 본질을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세잔은 집 근처 생트 빅투아르 산을 강산이 세 번 바뀔 때까지 끈질기게 탐색해 산 고유의 보편적 형태를 연작에 투사했다. 세상의 본질을 형태에서 찾은 세잔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본래의 모습, 그것만이 만고불변의 진실이라고 믿었다. 사물의 생성 순서를 거슬러 기하학적 원리에 따라 극단적으로 분해한 형태는 단순했지만 더할 나위 없이 단단하고 또렷하게 드러났다. 자신이 그토록 매달린 사물의 본질을 형태에서 발견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색만으로 그림의 완전체를 이뤄내
그렇다면 형태와 함께 조형의 양대 축인 색은? 여기서 세잔의 위대성이 발휘된다. 세잔은 ‘대상의 단순화’와 ‘다시점 관찰법’으로 형태의 본질을 파악한 뒤 자신이 개발한 ‘색채와 형태 동일성의 법칙’을 꺼내 들었다. 색과 형태는 한 몸이라 색으로 형태를 표현할 수 있다는 세잔의 말. 세잔이 본질로 돌아간 형태의 살결 곳곳에 상반되는 색을 병치하고 둘 이상의 색을 어울리게 조화를 부리자 형태가 더욱 선명해지면서 원근감과 입체감까지 되살아났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 중인 이 그림(1902~1906)은 세잔 말기에 그린 작품이다. 맨 앞쪽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빨간 색이 화면을 지배하고 있는 가운데 녹색을 거쳐 뒤로 갈수록 푸른색 계통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
빨강은 초록, 파랑과 함께 빛의 3원색이다. 초록과 파랑은 빨강과 보색 관계라 서로 어울릴 때 상대의 존재감을 상승시킨다. 붓질을 대충 한 것 같은데 삼각형, 원형, 사각형 등 도형 모양의 화면 속 물체들은 안정적이고 흔들림이 없어 보인다. 색의 대비와 색의 조화로 형태를 결정짓는 허리띠를 단단히 조여 맨 결과다. 전면을 중심으로 화면 중앙까지 밀고 나간 붉은색 너머로 푸른색 계통을 배치해 우리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앞에서 뒤로 향하도록 이끌었다. 빨강은 가까워 보이고 파랑은 멀어 보이는 색의 시각적 특징을 이용함으로써 원근감과 입체감, 공간 사이의 경계가 살아났다.
색으로 색을 말하면서 형태의 부각 효과는 물론 거리감에 이어 공간감까지 일석사조(一石四鳥)의 신비스러운 광경을 연출한 것이다. 전통 회화기법인 원근법과 세부 묘사 없이 색만으로 그림의 완전체를 이뤄낸 점이 놀랍다. 세잔의 이 업적은 현대미술의 시발점인 입체주의와 야수주의, 나아가 추상미술의 탄생으로 계승돼 그가 왜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지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생트 빅투아르 산’ 연작이 세잔의 ‘정물화’ 연작, ‘목욕하는 사람들’ 연작과 함께 현대미술의 여명(黎明)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박인권 문화칼럼니스트_ PIK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전 <스포츠서울> 문화레저부 부장과 한국사립미술관협회 팀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와 사랑에 빠진 그림> <미술전시 홍보, 이렇게 한다>, 미술 연구용역 보고서 ‘미술관 건립·운영 매뉴얼’ ‘미술관 마케팅 백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