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혁이 8월 1일 일본 도쿄올림픽스타디움 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육상 남자 높이뛰기 결선에서 2.35m를 성공시킨 후 기뻐하고 있다. │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4등이면 어떤가요? 즐기며 달렸고 가능성을 봤으니 후회는없습니다. 다시 뛸 힘이 납니다.”(우상혁)
선수와 국민 모두 변했다. 선수들은 금메달을 따지 못해도 스스럼없이 축제를 즐겼다. 국민은 팬으로서 선수들에게 열광했다.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가 개인의 노력과 결과의 가치를 인정해주면서 의식이 성숙해졌다는 방증이라고 평했다.
2020 도쿄올림픽 남자 높이뛰기에서 간발의 차로 동메달을 놓친 우상혁(25)이 8월 2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말했다. “경기장에선 아쉬움이 조금 있었을까? 그래도 빨리 인정했습니다. 한국 신기록도 세웠고 2m 37, 2m 39에 도전도 해봤고 말도 안 되게 넘을 뻔도 했습니다. 가능성을 봤기 때문에 후회는 남지 않았습니다.”
우상혁은 8월 1일 경기에서 2m 35를 넘어 1997년 이진택의 2m 34를 깨고 24년 만에 새 한국 기록을 작성했다. 마라톤을 빼고 우리나라 육상 사상 가장 높은 4위에 올랐다. 우상혁은 “아직도 꿈속에 있는 것 같다”며 “너무나 행복하고 즐겁게 뛰었기 때문인지 정작 내 경기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숙소에 돌아가 가장 먼저 경기 영상을 돌려봤다”고 말했다.
▶이다빈이 7월 27일 열린 태권도 여자 67㎏ 초과급 결승에서 세르비아의 밀리차 만디치에게 패한 뒤 승자에게 엄지를 들어보이고 있다.│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결과와 관계없이 올림픽 즐겨라
국민이 ‘4위’ 우상혁에게 열광한 건 결과와 관계없이 환히 웃으며 흥겨워하는 모습이 올림픽 정신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우상혁은 세상의 모든 4등을 향해 “즐겁게 계속 도전하면 못 이길 게 없다”고 응원했다.
그는 경기장 밖에서도 올림픽을 즐겼다. 우상혁은 8월 3일 자신의 누리소통망(SNS)에 2004 아테네올림픽 높이뛰기 금메달리스트 스테판 홀름(스웨덴)이 친구 목록에 올라와 있는 것을 확인했다. 우상혁은 ‘나의 롤모델 스테판 홀름이 맞팔이라니. 저는 성덕입니다’라고 썼다. 맞팔은 누리소통망을 서로 팔로우한다는 뜻이며 성덕은 ‘성공한 덕후의 준말’로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를 직접 만나거나 교류한 팬에게 쓰는 신조어다. 홀름의 팔로우로 힘을 얻은 우상혁은 2m 38에 다시 도전한다. 도쿄올림픽 남자 높이뛰기 금메달리스트의 기록은 2m 37이었다.
4등을 한 우상혁은 적극적·미래지향적 성향을 지닌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의 전형으로 꼽힌다. 우상혁만이 아니다. 이번 도쿄올림픽에 나선 선수들은 금메달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노력에 따른 결과를 받아들이고 지금을 즐기려 했다.
금메달 후보 1순위로 꼽히다 은메달에 그친 여자 태권도 이다빈(25)은 경기가 끝난 뒤 고개를 떨구지 않았다. 대신 미소를 지으며 상대방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유도 남자 -100kg급 결승 경기에서 피말리는 승부 끝에 일본의 에런 울프에게 금메달을 내준 조구함(29) 역시 경기가 끝난 뒤 승자의 손을 들어줘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이처럼 졌는데도 승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패자의 품격은 진정한 스포츠 정신을 보여줬다. 예전엔 금메달이 아니면 ‘죄인’이 된 듯 행동했는데 이들은 ‘최고’(금메달)가 아닌 ‘최선’을 자랑스러워한 것이다.
▶한 팬이 김수현에게 응원 메시지를 보냈다.│ 김수현 인스타그램 갈무리
선수들 변화에 국민도 진정으로 존중
선수들의 변화는 국내 팬들에게도 전파됐다. 스포츠 스타 같은 공인들이 스스로 노력한 결과를 인정하고 즐기는 것에 대해 국민도 진정으로 존중하고 있다. 이는 명실상부 선진국 반열에 들어선 우리 사회가 한층 성숙해졌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메달과 그 색으로는 잠재력을 평가할 순 없어요. 이미 잠재력을 보여줬어요!” 여자 역도 76㎏급 경기에서 아쉽게 동메달을 놓친 뒤 눈물을 흘린 김수현(26)의 누리소통망에는 팬들의 격려 메시지가 잇따랐다. 한 누리꾼은 “본인 탓 하지 말고 창피해하지도 말아라. 우리에게는 당신이 금메달”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김수현은 팬들의 메시지를 누리소통망에 하나하나 공유하면서 “감사하다”고 적었다.
과거보다 자유로워지고 개인을 중시하는 사회적 흐름이 스포츠 영역에서도 자리 잡아가고 있다. 올림픽이 국가 사이의 총성 없는 대리전이 아니라 참여해서 경쟁하는 스포츠의 제 모습을 찾은 것이다.
이준희 <한겨레> 기자
▶양궁 국가대표 김제덕(오른쪽)과 안산│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올림픽 성평등 가치 확산… 트렌드 된 혼성 종목
“믿을 수 없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꿈이었어요. 어마어마한 느낌이에요.”
역대 올림픽 최초로 열린 육상 4X400m(1600m) 혼성 계주에서 금메달을 따낸 폴란드의 앵커(마지막 주자) 카예탄 두신스키의 말이다. 폴란드는 7월 31일 도쿄 주경기장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육상 혼성 경기에서 대접전 끝에 3분 09초 87의 기록으로 우승했다. 4X400m 혼성 계주는 2019 도하육상선수권대회 때 첫선을 보였고 올림픽 정식종목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올림픽 데뷔전을 치른 혼성 종목은 육상뿐만이 아니었다. 양궁, 수영,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 유도, 권총 트랩 경기에서도 첫 혼성전이 펼쳐졌다. 양궁은 우리나라의 안산·김제덕이 첫 금메달의 주인공이 됐고 수영에서는 4X100m 혼성 혼계영에서 영국이 중국, 오스트레일리아를 꺾고 초대 챔피언이 됐다. 영국은 트라이애슬론 혼성 계주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남녀 3명씩 참가한 유도 혼성전은 프랑스가, 남녀가 짝을 이룬 사격 트랩 혼성 단체전에서는 스페인이 우승했다.
도쿄올림픽에서는 현재 기존에 혼합복식 경기가 있던 탁구, 배드민턴 등을 합해 총 18개 종목에서 혼성전이 펼쳐졌다. 리우올림픽 때는 혼성 종목이 9개였다.
혼성전에 대한 선수들 인식은 꽤 긍정적이다. 트라이애슬론 혼성전 금메달을 딴 조지아 테일러브라운은 영국 일간지 〈가디언〉 인터뷰에서 “내 영웅 중 한 명인 조너선 브라운리와 한 팀으로 경주할 수 있어 너무 기뻤다”면서 “브라운리에게 영감을 얻었듯 다른 세대도 우리를 보면서 영감을 얻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성평등 스포츠를 계속 강조했다. 이를 위해 개회식 때 남녀 기수가 입장하도록 규칙을 수정했다. 여성 선수의 참여율이 늘어난 혼성전도 확대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이번 대회 전체 참가 선수의 49%가 여성이 됐다. 이는 역대 올림픽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IOC는 2024 파리올림픽 때는 남녀 출전 선수 성비를 50 대 50으로 맞추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