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기, ‘가상 정신병’, 캔버스에 아크릴릭, 190×190cm, 2004, 삼성미술관 Leeum 소장
격세지감이다. 방탄소년단(BTS)의 ‘버터’가 빌보드 차트에서 아홉 번째 정상에 오르며 2021년 들어 가장 오랫동안 1위를 지킨 곡이 됐다. 과거 한때 전 세계 청춘들은 비틀스에 열광했다. 그런데 이제 지구촌 곳곳 어디에서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BTS를 환호하는 세상이 됐다.
대중문화의 영향력은 이처럼 여전히 막강하다. 새삼 수십 년 전 우리나라 미술계 상황이 떠오른다.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시절이었다. 1980년대 우리 미술계는 극단적 대립의 시기였다. 다양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직 모더니즘과 민중미술만 있었다. 모더니즘은 모노크롬(최근엔 ‘단색화’로 불린다)이라 일컬어지는 한국식 추상미술을 말하고 민중미술은 사회 비판적 리얼리즘 미술을 말한다.
이 두 진영은 서로를 무시하고 비난했다. 순수 대 참여, 추상 대 구상(형상), 제도 대 비제도, 주류 대 비주류, 중심 대 지역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치고받았다. 지금 생각해도 왜 그렇게까지 반목했는지 이해가 잘 안 된다. 하여튼 당시 미술대학을 다니던 학생들도 덩달아 암묵적으로 때론 직접적으로 선택을 강요받았다.
▶이동기, ‘국수를 먹는 아토마우스’,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160cm, 2003,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만화와 애니메이션 이미지 작품에 도입
이런 가운데 이쪽저쪽도 아니면서 예술성과 대중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거머쥔 작가가 나타났다. 이동기가 주인공이다. 이동기는 서울예고를 졸업하고 1986년 홍익대에 입학했다. 1987년 6·10민주항쟁, 1988년 서울올림픽,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등을 대학 재학 시절 목격하고 경험했다. 자연스레 선배 세대와 다른 환경에서 작가의 꿈을 키웠다.
그가 졸업할 무렵 1990년대 미술계는 1980년대와 많이 달라졌다. 모더니즘과 민중미술 갈등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민주화 이후 세계화와 국제화를 부르짖는 시대정신이 미술 분야에도 불어닥쳤다. 이념 대립이 사라진 빈자리를 대중문화가 대신 채웠다. 텔레비전, 영화, 음악, 방송, 만화, 춤, 패션 같은 타 장르가 현대미술에 접목됐다.
어느덧 우리나라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중견작가로 입지를 굳힌 이동기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한다.
“1980년대 미술계는 순수와 참여라는 두 영역으로 뚜렷하게 갈라져 있었고 저도 그런 분위기에서 미대에 다녔지요. 한편에선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식의 담론이 유행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문구에 그다지 공감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을 작품화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당시 예술이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 또는 일상과 지나치게 괴리돼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 자신의 일상 속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것에서 작품을 이끌어 내려 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한 것은 민중미술의 영향도 컸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민중미술 작품은 제게 현실에 대한 강력한 환기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현실은 정치 이슈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에게 현실이란 곧 ‘일상’의 다른 이름이었고 실제 생활 속에서 겪고 체험한 문화 자산을 말한다. 이런 인식과 작가적 태도는 어릴 때부터 즐겨 봤던 만화와 애니메이션 이미지를 작품에 도입하는 것으로 구체화됐다.
▶이동기, ‘보그’, 캔버스에 아크릴릭, 100×80cm, 2002
친근한 이미지에 첨예한 시대상 반영
‘아토마우스(Atomouse)’는 이동기가 창조한 캐릭터다. 만화영화 주인공 ‘아톰(Atom)’과 ‘미키마우스(Mickey Mouse)’를 섞어서 만들었다. 미키마우스는 월트 디즈니가 하숙집 방에 돌아다니던 쥐를 보고 탄생시켰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그리고 아톰은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감독 데즈카 오사무가 디즈니 만화영화에서 영향을 받아 만든 로봇 만화영화 ‘철완 아톰’의 주인공이다. 미키마우스는 미국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캐릭터고 아톰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일본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이미지다.
그때까지 우리 대중문화는 자생력이 부족했다. 미국과 일본을 거쳐 수입된 서구 문화를 흉내 내는데 그치는 수준이었다. 누군가는 이런 우리 대중문화의 특수성을 ‘짬뽕문화’라고 불렀다. 노골적으로 비하하고 자조 섞인 평가를 내리던 시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근대 이후 우리나라는 정치뿐 아니라 문화 전반에 걸쳐 미국과 일본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동기는 이런 역사와 현실에 문제의식을 갖고 미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대중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결합시킨 ‘아토마우스’를 창조한 것이다.
이동기의 그림은 대체적으로 심오한 예술성보다 쉽고 친근한 대중성에 편중된 것으로 읽힌다. 주로 만화에서 차용한 이미지를 밝은 원색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 이면엔 첨예한 사회 이슈와 시대상이 반영된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정식 캔버스 위에 밀도 있게 채색된 화면은 웬만한 회화 작품보다 뛰어난 수준의 완성도를 보여준다. 예술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흔치 않은 작품이다.
▶이동기, ‘롤 플레잉게임’, 종이에 펜 아크릴릭, 30×25cm(각), 2011
이준희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겸임교수_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창작에서 전향해 몇 년간 큐레이터로 일했고, 미술 전문지 <월간미술>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까지 맡아 18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것보다 여전히 아티스트에 가까운 ‘미술인’으로 불리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