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간 통신연락선이 복원된 7월 27일 군 관계자가 서해지구 군 통신선을 활용해 시험통화를 하고 있다.│ 국방부
7월 27일은 6·25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된 날이다. 북한에서는 이날을 ‘727 전승기념일’이라고 부른다. 북한이 미국과 전쟁에서 이겼다는 의식이 깔려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이날 평양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탑 앞에서 열린 제7회 전국노병대회에 참석한 것도 북한 사람들의 이런 의식을 고려한 것이다. 최고 지도자로서 ‘727 전승기념일’을 맞아 전승기념탑 앞에서 당시 전쟁에 참여한 노병들을 치하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건 없다고 강조한 것이다. ‘727’이라는 숫자는 북한에서 숭고한 숫자로 여겨진다. 특히 김정은 위원장이 후계자로 공식 등장하면서 ‘727’ 숫자의 사용이 더 늘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자매지 <환구시보>에 따르면 김정은 위원장이 2010년 9월 북한 조선로동당 당 대표자회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로 공식 등장한 이후 당 최고 간부들과 당 공용버스 번호판의 첫 세자리가 김정일 생일을 의미하는 ‘216’(2월 16일)에서 ‘727’로 바뀌었다.
김정일 차량 번호는 ‘216’에 북한에서 최고의 길수로 여겨지는 ‘9’를 연속 사용해 ‘216-9999’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김정은 위원장의 차량 번호판은 물론 북한 고위 간부들이 거주하는 평양 대동강구역 의암동 ‘은덕촌’(恩德村: 김정일이 은덕을 베푼 주거촌)에 즐비한 최고급 수입차량의 번호판은 모두 첫 세자리가 ‘727’로 시작한다.
베트남 하노이 제2차 북미정상회담 결렬 직후인 2019년 3월 10일 김정은 위원장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투표를 위해 김책공업종합대학을 찾았을 때 <조선중앙TV>를 통해 공개된 김 위원장 차량번호는 ‘727598’이었다.
‘727’ 꽂힌 김정은, 차량 번호판도 담배도 ‘727’
북한에서 차 번호판이 ‘727’로 시작하면 각종 교통 통제를 받지 않는다. 특권층의 상징이다.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서 리정혁 대위가 탄 차량이 평양 시내에서 교통 통제를 받지 않고 질주하던 장면에서 번호판이 있었다면 ‘727’로 시작했을 것이다.
일본 <아사히신문>에 의하면 김정은 위원장은 고위 간부들에게 2017년 10월부터 ‘727’로 시작하는 차량 번호판을 주었다고 한다. 김정은이 즐겨 피운다는 북한산 담배 이름도 ‘727’이다.
일각에서는 김정은이 숫자 ‘727’을 선택한 이유로 할아버지인 김일성 계승 의지를 밝힌 것이라고 해석한다. 중국에서는 김정은이 중국의 6·25전쟁 참전을 상기시켜 중국과 우호를 돈독히 하기 위한 것이라고 풀이한다.
그 배경이 무엇이든 간에 김정은은 자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숫자인 ‘727’ 날짜에 맞춰 남북 통신선 복원에 나섰다. 좋은 날을 골라 ‘한 번 잘해보자’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 아닐까?
남북 당국은 정전협정 체결 68주년이 되는 날인 7월 27일 오전 10시부터 통신선을 복원하기로 했다고 각각 공식 발표했다. 2020년 6월 9일 북한이 남북 간 모든 통신선을 일방적으로 끊은 지 413일 만이다.
이번 통신선 복원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합의에 따른 것이다. 두 정상이 주고받은 친서의 구체적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양측은 하루 속히 남북 간 상호 신뢰를 회복하고 관계를 다시 진전시켜 나가기로 합의했다.
이번 통신선 복원 및 대화 재개 합의가 문 대통령 임기 내 이뤄졌다는 점에서 특히 큰 의미가 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했다. 두 정상이 지난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사항은 향후 ‘꼭 지켜야 할 약속’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또한 이번 통신선 복원은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의 판문점 선언, 2018년 9월 18~20일 평양 남북정상회담의 평양공동선언을 부활시키는 조치로 기록될 것이다.
이를 계기로 남북이 상호 간에 일체의 적대적 행위를 중지하기로 한 남북군사합의는 굳건한 토대를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남북 정상 간 핫라인이 남북관계 최악의 시기에도 정상 가동되고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양측의 위기관리 능력은 믿을 만한 수준에 다다른 것이다.
남북대화에 강원·경기·제주 지자체장들 가세한다면…
이번 통신선 복원을 디딤돌로 삼아 앞으로 남북정상회담을 비롯한 어떠한 남북 또는 북미 간 이벤트도 불가능하지 않은 상황이 됐다. 앞으로 뭔가 이뤄진다면 김정은 위원장의 답방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남북 정상들이 수십년간 필요성을 논했지만 아직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은 남북 군사공동위원회가 열릴 가능성도 적지 않다.
정부는 이렇게 남북 합의사항을 준수하는 한편, 남북관계가 악화됐을 때 회복을 막았던 기구나 체제를 복기해 대책 마련에도 나서야 한다. 한미워킹그룹은 6월 말 폐지돼 숨통이 트였지만 남북관계의 진전에 있어 거의 모든 사안에 관여하는 유엔군사령부의 역할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유엔군사령부는 6·25전쟁 휴전 이후 남북 간에 혹여 일어날 지 모르는 군사적 충돌을 막기 위한 유엔 차원의 최소한의 기구이자 수단이다. 그러나 현재 남북의 평화 교섭과 교류·협력, 인도적 지원 등 거의 모든 소통에 관여하고 있다. 군사적 위기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마련해놓은 장치가 평시 모든 접촉 전 승인 기구 역할을 맡고 있다.
앞으로 전개될 남북 간의 대화는 범위가 더 넓어지고 깊어져야 한다. 남북의 경제단체, 학계, 문화예술계, 체육계 등 전문인들의 교류가 활성화되고 지방자치단체 간 교류 등도 이어진다면 내실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특히 북한과 접경 지역인 강원도와 경기도, 김정은 위원장 답방 가능성이 있는 제주도 등의 도지사들이 대화에 가세한다면 그 의미와 파장은 더욱 클 것이다.
김수한_ 헤럴드경제 기자(북한학 박사·한국기자협회 남북통일분과위원회 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