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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반복된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남북통일 과업을 어깨에 짊어진 우리 세대들에게 큰 교훈을 준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팽팽하게 맞붙는 현장, 한반도에서 무력통일을 이루기 위해 신라는 외세(당나라)와 결탁을 택했다. 신라는 나당연합군으로 통일을 이뤘으나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한반도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당나라의 야욕에 맞서 싸워야 했다. 신라는 다행히도 당나라를 몰아냈으나 우리의 오랜 터전이었던 광활한 만주벌판과 한반도 북부 일부는 빼앗기고 말았다. 외세에 의존하면 그 ‘빌려온 값’을 비싸게 치러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외세에 의존하면 신성한 국가의 주권을 온전히 행사하기 어려워진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 야욕을 막아내기 위해 청나라, 러시아 등 외세에 의존했던 대한제국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잇따라 승기를 잡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며 또 한 번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일제의 패망 이후 대한민국이 곧바로 주권을 회복하지 못한 것도 우리가 외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탓이다. 그리고 그러한 외세 의존성은 어김없이 비극으로 이어졌다.
38선을 경계로 한반도의 남쪽은 미군, 북쪽은 소련군이 점령해 실시된 미소 군정은 몇 년 후 터질 6·25전쟁의 서막이 되었고 급기야 발발한 이 전쟁에서 우리는 일본도 청나라도 러시아도 아닌 동포를 상대로 한 무자비한 대규모 살육전의 참상을 겪었다.
무력이 아닌 평화통일의 중요성
앞으로 다가올 미래 또한 주변 세력에 의존하다가 본의 아닌 귀결에 이를 수도 있다. 2009년 9월 미국 국방부가 공개한 국방정책 4개년 보고서(QDR)의 북한 붕괴 시나리오는 우리 스스로 통일에 적극적이지 않았을 때 한반도의 미래상을 생생히 보여준다.
이 시나리오에 따르면 북한이 붕괴하면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유엔(UN)이 북한 지역을 분할 점령하도록 돼 있다. 북한이 붕괴하면 남한 주도의 흡수통일이 이뤄질 거라는 일반적 인식과는 거리가 먼 내용이다. 평양과 황해남북도는 유엔, 강원도는 미국과 일본, 함경북도는 러시아, 함경남도와 평안남북도 및 자강도와 양강도는 중국이 점령한다는 식이다.
북한이 없어졌지만 여전히 휴전선 아래에 머물고 있는 대한민국의 형세는 백제와 고구려 멸망 이후 한반도 중남부까지 영역을 확장하는데 그친 통일신라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나당연합군이 이룬 삼국통일과 한미연합군이 이뤄낼 무력통일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상대방을 무력으로 진압해 명목상의 통일을 이룬다 하더라도 상처뿐인 영광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꿈꾸는 남북통일의 이미지는 이런 모습이 아니다. 현재의 남북한 지도가 같은 색으로 칠해진 한반도기가 우리가 바라는 통일된 나라의 모습이다. 여기에 간도와 만주 등 우리 조상들이 살던 과거 우리 영역까지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남북 화합을 바탕으로 이뤄야 할 이러한 통일 조국의 미래는 무력이 아니라 협상을 통한 평화적 방식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는 셈이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통일된 한반도의 모습조차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듯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 주도적으로 통일을 이뤄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헌법 제4조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와 헌법 제66조 제3항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는 규정에 따라 정부는 평화적 통일을 추진해야 하며 평화통일을 추진할 우리 정부의 구심점은 대통령이다.
남북 스스로 운명 결정해야
역대 대통령들은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통해 평화적 통일 논의를 진전시켜왔다. 통일의 당사자인 남북이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기 위해선 상호 의지를 확인하는 절차가 가장 중요하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남북 최초의 제1차 남북정상회담에 참석해 6·15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10월 2~4일 평양에서 열린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남북관계의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 선언)을 발표했다.
2017년 5월 10일 대통령 취임선서에서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서라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겠다”고 다짐한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서 제3차 남북정상회담(문재인 대통령 재임 중 제1차), 5월 26일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제4차 남북정상회담을 했고 6월 10~11일 싱가포르 센토사 섬 카펠라호텔에서 제1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린 뒤인 9월 18~20일 평양과 백두산에서 제5차 남북정상회담을 열었다. 단 5개월 만에 세 번의 남북정상회담을 일사천리로 치른 것이다.
하지만 2019년 2월 27~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뜻밖에 결렬되면서 한반도 정세는 차갑게 얼어붙고 말았다. 2020년 6월 16일에는 2018년 4월 제3차 남북정상회담 합의에 따라 개성에 설치된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건물이 돌연 폭파돼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하지만 2021년 1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취임했고 5월 21일 미 워싱턴DC에서 한미 정상회담, 6월 13일 영국에서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문 대통령이 잇따라 참석하면서 마지막 남은 불씨가 살아나고 있다. 6월 22일에는 2018년 9·19 평양공동선언 직후인 2018년 11월 출범한 한미 워킹그룹이 폐지돼 남북협력사업을 가로막던 족쇄가 풀린 것으로 평가된다.
2017년 5월 취임 당시 미국 주간지 <타임>의 표지를 ‘협상가(Negotiator)’라는 타이틀로 장식했던 문 대통령은 임기 1년여를 남겨둔 시점인 6월 24일 4년 2개월 만에 다시 ‘마지막 제안(Final Offer)’이라는 제목이 붙은 <타임> 표지를 장식했다. 마지막 제안이란 문 대통령의 임기 내내 추진했던 남북관계 개선 노력의 마지막 한 수가 될 전망이다. 그 한 수는 통일된 나라의 모습을 한반도기의 모양으로 만들려는 시도일 것이다.
김수한 헤럴드경제 기자
(북한학 박사·한국기자협회 남북통일분과위원회 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