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 고용보험 가입자가 말한다
2020년 12월 10일부터 시행된 예술인 고용보험이 빠르게 예술인들의 일상에 스며들고 있다. 제도 도입 두 달 만에 가입자 1만 명을 넘어서더니 6개월째인 2021년 6월 들어 3만 명을 넘어섰다. 무용과 연극 분야 예술인에게 고용보험이 가져온 변화를 물었다.
6월 6일 저녁 8시가 다 된 시간. 안무가이자 무용수 안현민(28) 씨가 연습 도중 짬을 내 전화를 했다. 이날은 6월 12~13일 무대에 올릴 ‘혜석을 해석하다’ 공연 준비로 늦은 시간까지 일정이 끝나지 않았다.
“봄 시즌이 바쁠 때에요. 객석 거리두기로 관객은 줄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무대 위에서 소통하고 있어요. 참 감사하죠. 요즘은 5월 공연을 마치고 다음 무대에 올릴 작품을 연습하고 있습니다.”
안현민 씨는 고블린파티 소속 단원이다. 고블린파티는 대표 없이 모든 멤버가 안무가로 구성된 젊은 창작 집단이다. 안 씨를 포함해 9명의 안무가가 고블린파티 소속으로 활동한다.
연습도 계약 기간에 포함
안 씨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고블린파티에 합류해 어느덧 5년 차 안무가가 됐다. 그는 특별한 업무를 하나 더 맡았다. 경리·회계 업무다. “3~4년 됐어요. 고블린파티 같은 독립 단체가 경리·회계 담당자를 따로 두고 운영하기는 재정적으로 힘들거든요. 예술인 고용보험 신고와 납부도 제가 합니다.”
2020년 12월 10일부터 예술인 고용보험이 시행 중이다. 안 씨는 “고용보험용 문화예술용역 계약서를 쓰고 있다”며 그사이 달라진 변화로 계약서부터 언급했다.
예술인 고용보험은 노동 기간에 상관없이 장·단기 예술인 모두에게 적용된다. 여기서 예술인은 문화예술용역 계약을 하고 자신이 직접 노무를 제공하는 사람을 뜻한다. 문화예술용역 계약 체결이 예술인 고용보험의 가입 요건이다. 계약을 체결할 때 노무 제공 기간을 특정할 수 있는 계약 기간과 해당 기간의 보수지급액을 분명히 명시해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실업급여를 수급할 때 오해와 분쟁을 방지할 수 있다. 표준계약서 작성이 예술인 고용보험 적용에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다.
유독 공연 기간이 짧은 무용계에서 예술인 고용보험 가입은 잘되고 있을까?
“연습 기간이 계약 기간에 포함돼 있어요. 공연 계약 건수도 여러 개가 맞물리면서 4월 말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고용보험료를 냈어요. 며칠 공백이 있었지만 5월 다른 작품에 들어가면서 피보험 자격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가입 시스템 좀 더 간편했으면
시행일부터 5개월간 꾸준히 고용보험을 내고 있지만 예술인 고용보험이 가져올 변화를 체감하려면 다소 보완해야 할 것들이 있다.
“계약서에 명시한 금액에서 20%를 제외한 금액을 기준 보수로 잡아요. 기준 보수의 0.8%씩 사업주와 예술인이 반씩 부담해요. 근데 예술인 보수란 게 일반 직장인과 비교하면 많이 낮아요. 신작일 경우 보통 4~5개월은 연습해야 합니다. 직장인들이 받는 월급 200~300만 원은 예술인에겐 언감생심이에요. 그러다 보니 나중에 실업급여와 출산급여로 얼마 받을지 감이 안 와요.”
그럼에도 안 씨는 예술인 고용보험제도에 적극 공감한다. “어떻게 해서든 예술을 노동으로 인정해주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참 반가운 제도입니다. 단기 작업도 연습 기간도 근로로 인정해 고용보험을 산정하고 있어요. 불안정한 예술인 생활에 조금이라도 안정을 주는 것 같습니다.”
실무자 입장에서 고충도 물어봤다. “신청과 납부가 달라 헷갈렸어요. 초반 한 달간 고용보험 담당자에게 묻고 또 물어봤죠. 보통 예술가 작업이 프로젝트 사업이 많아요. 그래서 증빙할 게 많고 이 때문에 납부도 분할로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절차가 복잡해요. 시스템이 좀 더 간편해지면 참 좋겠습니다.”
두 아이의 아빠인 연극배우 이종승(48) 씨는 밤 12시에도 쉬이 잠자리에 눕기 어렵다. 밤 11시가 돼야 큰아이를 재운 이 씨가 조용히 누리소통망(SNS)으로 말을 건넸다.
이 씨가 참여한 연극 ‘반성문, 살인기억’은 부산의 형제복지원이 1975~1987년까지 부랑인을 선도한다는 명목으로 장애인, 고아 등을 불법 감금하고 강제 노역시키며 각종 학대를 가한 대표 인권 유린사건을 그렸다. 지속 가능한 공연을 만들기 위한 협동조합 ‘지공연’의 작품이다.
이 씨는 시행 6개월째 접어든 예술인 고용보험에 가입했을까? “고용보험 미가입 상태입니다. 온라인 펀딩 플랫폼인 텀블벅 후원으로 진행하는 연극이에요. 보수가 정해져 있지 않아요. 이익이 나면 다 같이 조금씩 나누어 가지는 거죠.”
실업 기간 안정에 큰 도움 기대
코로나19 원년인 2020년에 이 씨는 드문드문 무대에 올랐다.
“사북탄광 노동항쟁 40주년 기념 뮤지컬 ‘사북, 화절령 너머’,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범죄물로 재해석한 연극 ‘리어 누아르’,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연극 ‘불편한 너와의 사정거리’ 등 5편 정도 했어요. 관객 수입이 거의 없어 보수는 차비 정도 받았지만요.”
코로나19 시대의 더욱 극심해진 예술인 현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씨 또한 생계 고민이 깊었다. “대리운전도 하고 일용직 건설 일도 나가고 무대 제작이나 셋업 알바도 하며 돈 되는 일은 뭐든 했어요.”
코로나19 이전에도 이 씨를 비롯해 대학로의 많은 배우가 여러 일을 하며 배우의 삶을 버텨왔다. 이런 불안정한 생활이 일상이었기에 이 씨는 예술인 고용보험제도 자체를 더 크게 반겼다.
“예술인 고용보험은 우리가 오래도록 기다려온 제도입니다. 앞으로 실업 기간 안정에 큰 도움이 되리라 기대해 주변에 적극 가입을 권유하고 있습니다.”
연극 분야는 가입 장벽 높아
하지만 현실은 아직 냉랭하다. “연극은 연습 시간이 예술 활동에 포함이 안 돼요. 그러다보니 월평균 소득 50만 원 이상 가입 요건을 채우기 어렵습니다. 피보험 기간 산정과 종료 후 신고, 합산 시 개인 신고 등 절차도 복잡하고요.” 이런 연유로 이 씨는 아직 예술인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못했다.
공연예술인노동조합 위원장으로서 그에게 들려온 공연계의 다양한 목소리도 들어봤다.
“공공기관에서 진행하는 공모나 지원 사업은 고용보험 가입을 의무화해 적용이 어렵지 않지만 최저임금 기준을 맞추지 못해 가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입 당사자들이 일일이 공부하다 보니 현장에서 답답하다는 소리가 많아요. 주변에서 노동조합이 전담 창구를 운영해주면 좋겠다는 요청을 많이 합니다. 최소 1년은 실험 기간이라고 봅니다. 문제점을 모아 지속해서 개선해야죠.”
심은하 기자
공연 없을 때 실업급여 받고 출산에 따른 경제 부담 덜어
시행 6개월 만에 가입자 3만 명을 돌파한 예술인 고용보험에 대해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은 “예상보다 빠른 진행”이라며 “작은 극단은 어려움을 호소하지만 좋은 출발”이라고 평가했다. 무용인희망연대 오롯 소속의 박성혜 무용평론가는 “아시아 최초로 우리가 시도했다. 프랑스보다 더 좋게 설계됐다”며 “향후 해외에서 따라할 만하다”고 우수성을 꼽았다. 예술인 고용보험은 왜 생겼고 예술인에게 어떻게 도움이 될까?
대부분 수입이 불규칙한 예술인은 예술 활동으로 소득이 있는 기간 외에는 사실상 실업 상태다. 예술 활동 준비 기간이 길면 이 기간에 생활 안정 자금이 필요하다. 이에 따라 고용노동부는 고용보험법에 예술인의 고용보험 적용 특례 규정을 두고 예술인이 실업 기간에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예술인이 출산 또는 유산·사산 등으로 노무를 제공할 수 없을 때도 제도에 따라 출산 전후 급여 등을 지급해 출산에 따른 경제 부담도 더는 방안도 마련했다.
구직 급여를 받으려면 먼저 이직일 이전 24개월 중 피보험자격 취득 기간이 9개월 이상이어야 한다. 복수의 피보험 자격 취득 기간이 있으면 이를 합산하면 된다. 단, 계약 기간이 1개월 미만이라면 며칠 동안 일을 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피보험 기간 산정은 노무 제공일이 월 11일 이상이면 1개월로 간주한다. 11일 미만이면 해당 월의 노무 제공일을 모두 합산한 후 22일로 나눠 월 단위로 환산하도록 규정한다. 자발적 이직 등 수급 자격 제한 사유 없이 적극적인 재취업을 위해 노력했다면 120~270일간 구직 급여를 받을 수 있다.
임신한 예술인이 출산일 전 3개월 이상 보험료를 납부하고 출산일 전후로 노무를 제공하지 않았다면 90일 동안 출산전후급여를 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