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통화 모습을 그래픽으로 재연했다.│연합
미국 여배우 스칼렛 요한슨이 2017년 3월 자신이 출연한 영화 홍보를 위해 내한했을 때의 일이다. 2017년 3월 10일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선고가 내려진 날이다. 뜬금 없기는 했지만 시기가 시기였던 만큼 한 취재진이 그에게 한국 대통령 탄핵 사태에 대한 의견을 물었고 그는 예상대로 답변을 완곡히 거부했다.
하지만 “영화처럼 투명인간이 된다면?”이라는 취재진의 질문이 재차 이어지자 “청와대에 들어가서 모든 것을 알아낸 다음 여러분께 탄핵에 대한 답을 드리고 싶다”고 답변했다. 처음 질문에 답변하지 못한 미안함을 다음 질문에 실어 일종의 성의를 보인 것이다. 물론 관점에 따라서는 그 답변 또한 엉뚱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말이다.
돌이켜보면 그의 답변은 즉흥적이고 단순했지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겪어보지 않고서는 그 어느 것도 쉽게 이야기할 수 없음을, 직접 보고 듣지 않고서는 말하지 않음이 미덕이 될 수 있음을, 그는 어렴풋하게 우리나라 대중들에게 어필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 얘기로 서두를 시작한 이유는 남북 정상 간에 구축된 핫라인(직통전화)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다.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후로 남북 통신선이 모두 단절됐다는 이야기도 있고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등 북측이 우리에게 보이고 있는 일련의 차가운 반응을 보더라도 남북 정상 간 핫라인 또한 가동되지 않고 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하지만 항상 드라마나 영화의 극적 반전은 전혀 가능성이 없을 것 같던 어떤 요소가 출현하면서 나타난다. 그런 것 중 하나가 남북 정상 핫라인이라면 얼마나 드라마틱한 후일담이 될까? 분명한 것은 양측이 2018년 4월 20일 남북 정상 간 핫라인을 연결했다는 것이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는 “양쪽 전화 연결선의 끝이 우리는 청와대, 북쪽은 국무위원회다”라고 말했다.
핫라인 설치 후 남북 소통 급물살
남북 정상 간 핫라인 구축은 2018년 4월 5일 정의용 당시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대표로 한 대북 특사단이 방북했을 때 북쪽과 합의한 사안이다. 또한 그로부터 불과 보름만인 4월 20일 실제로 개통됐다.
남북 정상 핫라인이 당시 최초로 설치된 건 아니다. 2000년 6월 열린 최초의 남북정상회담 이후 처음 개통됐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관계가 악화하자 2008년 끊기고 말았다.
이번에 다시 설치된 남북 정상 핫라인은 그러나 앞서 설치된 핫라인과는 격을 달리 한다. 전에는 우리 국가정보원과 북측 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에 설치됐으나 이번에는 남북 정상 집무실에 설치됐다.
공교롭게도 핫라인 설치 이후 양측의 소통은 급물살을 탔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8년 4월 27일, 5월 26일, 9월 18~20일 세 차례의 정상회담을 가졌다. 2000년과 2007년 두 번 열렸던 회담이 불과 5개월 동안 세 번이나 열린 것이다.
특히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핫라인의 필요성이 큰 시기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대면 회담이 부담스러운 이 때 양 정상 간에 직통전화가 있다는 것은 큰 위안이자 축복이다. 아울러 남북대화나 북미대화를 위한 여건 역시 무르익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5월 21일 한미정상회담에서 2018년 4월 27일의 판문점선언과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성과를 존중하기로 했고 성 김 대북정책특별대표를 임명해 북한과 본격적인 대화 가능성도 열어뒀다.
또한 한미 외교당국은 6월 22일 남북 교류협력의 ‘훼방꾼’ 이미지로 전락한 한미워킹그룹을 폐지했다. 한미워킹그룹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재임 시절인 2018년 11월 남북 협력과 대북제재 문제 등을 조율하기 위해 출범했다. 하지만 신종플루 치료제 타미플루의 대북 인도적 지원을 둘러싸고 운반 트럭의 제재여부를 따지다 지원 자체를 무산시키는 등의 행태로 비난을 샀다.
이런 사례가 속출하자 남북 양측에서 한미워킹그룹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워킹그룹 운영 및 기능을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여러 차례 언급했고 김여정 조선로동당 부부장은 워킹그룹에 대해 “남측이 스스로 제 목에 걸어놓은 친미사대의 올가미”라고 비난했다.
<사랑의 불시착> 같은 극적 반전 일어날까?
북한 사정에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현재까지 북한에서는 남한이나 미국의 대화 요구에 일체 응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북한의 카드는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 제2차 북미정상회담에서 모두 공개된 상태다.
당시 북한은 영변 핵 개발 시설을 폐기하는 대가로 미국에 대북 제재 완화를 요구했다. 북한 핵 개발의 중심인 영변 핵 시설 폐기는 북한 비핵화에 있어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당시 미국은 종전 선언, 북미 연락사무소 설치 등의 카드를 고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협상 막판 트럼프 대통령은 영변 외의 핵 개발 시설도 모두 폐기할 것을 요구해 협상 결렬로 향했다.
훗날 존 볼턴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회고한 바에 따르면 이런 결정은 미국 국내 상황을 고려해 ‘빅딜’ 카드를 꺼내어 ‘노딜’로 가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북미정상회담이 열리던 시점, 미국에서는 트럼프의 전 변호사 마이클 코언이 의회 청문회에 출석해 미 언론의 관심이 청문회에 집중돼 있었고 이에 위협을 느낀 트럼프가 협상 결렬로 방향을 틀었다는 것이다. 미국 국내 정치가 북미 관계를 틀어버린 셈이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안보 전문가들은 만약 당시 북미가 작은 합의(스몰딜)라도 이뤄냈다면 오늘날 한반도 안보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국정원은 7월 9일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북한이 대화에 나설 수 있다”는 진단을 내놓았다. 평양에서 하노이까지 4500km에 달하는 거리를 50시간가량 기차로 달려갔다 빈손으로 돌아온 김정은 위원장으로서는 대화가 목적인 대화에는 응하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 바이든 대통령이 어떤 카드를 내놓을지가 관건인 셈이다. 공은 바이든에게 넘어가 있다.
여기에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핫라인이 지금도 가동되고 있다면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과 같은 극적 반전이 현실에서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다.
김수한_ 헤럴드경제 기자(북한학 박사·한국기자협회 남북통일분과위원회 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