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초, ‘성 삼위일체’, 프레스코, 667×317cm, 1427, 이탈리아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소장│ⓒwikipediacommons, public domain
원근법은 우리 눈에서 가까운 물체는 크게 보이고 먼 물체는 작게 보이도록 표현하는 미술 기법이다. 원근법은 가상과 현실, 환영과 실재의 경계를 없앤 마법의 회화 기법이다. 원근법의 출현으로 사람들은 평평한 벽이나 캔버스에 묘사된 그림을 보고서도 실재 공간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짜릿한 공간감을 만끽할 수 있게 됐다.
원근법의 발명은 서양미술의 역사에 일대 전기(轉機)를 불러온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회화에 원근법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1427년,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이다. 27세의 이탈리아 출신 천재 화가 마사초(1401~1428)가 그림의 역사를 완전히 뒤바꾼 원근법을 선보였다. 순간 2차원에 머물렀던 그림 세계는 3차원의 신천지로 나아갔다.
이후 원근법은 서양미술을 지탱한 불변의 진리이자 불문율로 모든 화가가 떠받들었다. 원근법의 절대성은 1830년대 실제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사진의 발명에서 촉발된 현대미술 시대가 열릴 때까지 계속됐다. 물론 오늘날에도 여전히 원근법은 회화 기법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다.
그러면 마사초는 어떻게 원근법을 터득했을까? 20대 초반 마사초는 피렌체에서 활동하던 아버지뻘의 대선배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와 교류했다. 브루넬레스키는 르네상스 건축의 거장으로 당대 최고의 건축가였다. 그에게서 원근법 원리를 어깨너머로 배운 마사초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기념비적인 회화를 세상에 선보였다.
역사상 최초로 원근법 구사해 탄생한 그림
27세의 나이로 요절하기 1년 전인 1427년에 완성한 ‘성 삼위일체(Holy Trinity)’는 높이 667cm, 너비 317cm의 거대한 프레스코 회화로 인류 역사상 최초로 원근법을 구사해 탄생한 그림이다. 르네상스 회화의 선구자를 낳은 ‘성 삼위일체’는 1100년간 지속된 비잔틴 미술(325~1453)이 르네상스 미술로 전환되는 전환점 역할을 한 획기적인 그림이다. 유서 깊은 이탈리아 피렌체 산타마리아노벨라성당(1278~1350, 1458년 개축)에 소장돼 있다.
1401년 피렌체 근교의 산 지오반디 발다르노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마사초는 16세 때 피렌체로 이주해 그림 공부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직업화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은 1422~1428년 단 6년에 불과하지만 르네상스 회화를 개척하는 데 기여한 그의 예술적 업적은 후대 화가들이 아낌없는 찬사를 바쳤을 정도로 위대했다. 마사초는 1428년 로마에서 사망했다. 독살설과 약물중독으로 죽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확인된 바 없다.
‘성 삼위일체’는 영원히 계속될 것 같던 비잔틴 미술 제국의 심장을 찌른 그림이다. 숨을 멎게 한 무기는 ‘1점 투시원근법’과 빛과 그림자를 이용한 명암 대비, 그림을 조각 작품처럼 표현한 탁월한 입체적 사실감, 현실 세계 속 인간의 등장, 죽음의 상징적 표현을 통한 삶의 유한성 암시 등이다. 모두 신(神)의 영역에 있었던 비잔틴 미술에서 볼 수 없었던 것들이다.
마사초는 신성시돼던 비잔틴 미술을 인간계로 불러냈다. 1점 투시원근법은 그림에 공간감과 입체감을 불어넣었고, 자연광을 이용한 빛의 효과로 양감과 질감을 살렸다. 살아 있는 속세의 인간 모습과 해골을 대비해 인간의 영역을 강조했다. 마사초로 그림은 범접할 수 없는 하늘에서 인간이 숨 쉬고 있는 땅으로 내려왔다.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 미술이 시작된 것이다.
그중 1점 투시원근법은 마사초가 최초로 정복한 회화사의 신대륙으로 서양 미술사가 근대회화로 나아가는 결정적 뿌리가 됐다. 1점 투시원근법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모든 선이 한곳으로 수렴되는 소실점을 통해 2차원의 평면을 3차원의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시각적 원리다. 공간감과 거리감, 입체감이 생기면서 그림 속 풍경이 실재 풍경처럼 보이는 요술 같은 회화 법칙이다.
‘성 삼위일체’ 그림에서 소실점은 예수가 못 박혀 매달려 있는 십자가의 다리 맨 아랫부분 중앙이다. 화면 아래 무릎을 꿇은 두 기증자를 받치고 있는 돌계단 바로 위, 두 사람을 잇는 수평선의 가운데 점과 십자가가 만나는 지점이다.
삶의 유한성과 가치의 엄중함 암시
마사초가 1점 투시원근법으로 서양 미술사에 한 획을 긋자 ‘성 삼위일체’ 그림은 실로 놀라운 장면을 연출하게 된다. 반원통형의 사각 격자무늬로 된 천장 아래 성부인 하느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성자 예수의 두 팔을 받쳐 들고 있다. 하느님의 얼굴 바로 아래에는 예수의 머리 쪽으로 날아가는 흰 비둘기가 보인다. 성령의 상징이다. 그림 제목처럼 ‘성 삼위일체’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놀라움은 계속된다. 채플 안에 네 개의 공간적 거리가 형성되면서 채플 바깥까지 모두 다섯 개의 공간이 생겼다. 가장 깊숙한 안쪽에 천정의 사각 무늬, 그 앞으로 하느님에 이어 예수, 마리아와 요한, 마지막 두 봉헌자까지 저마다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지금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이 그림인가 진짜 건물인가.” ‘성 삼위일체’ 벽화를 처음 본 당시 사람들의 충격과 놀라움은 익히 짐작이 간다.
한편 어슴푸레한 천정과 달리 채플 바깥으로 나올수록 점차 밝아지는 빛과 그림자의 대비 효과는 인물과 건물 곳곳의 부피와 무게를 실감나게 이끌고 있다. 자연광, 햇빛의 원리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림 맨 아래 놓인 것은 석관이다. 석관 뚜껑 위에 해골이 정지된 시간처럼 누워 있다. 석관과 해골 모두 평면 그림이라고 믿기지 않는다. 강하게 돌출된 모양에서 우리 눈은 조각으로 반응한다. 그 안쪽 벽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지금의 나(해골=죽음)는 원래 당신(살아 있는 모든 사람=삶)과 같았다. 당신도 언젠가 나처럼 될 것이다.”
삶의 유한성과 삶의 가치의 엄중함을 암시하는 경구이자 인간 세계를 그리고자 한 르네상스 정신의 상징이다.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는 한 화면에 회화(인물)와 조각(석관), 건축(채플 안팎)이라는 또 다른 삼위일체를 성공적으로 구현한 위대한 걸작이다.
박인권 문화칼럼니스트_ PIK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전 <스포츠서울> 문화레저부 부장과 한국사립미술관협회 팀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와 사랑에 빠진 그림> <미술전시 홍보, 이렇게 한다>, 미술 연구용역 보고서 ‘미술관 건립·운영 매뉴얼’ ‘미술관 마케팅 백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