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캔버스에 유화, 491×716cm, 1818~1819, 루브르 박물관 소장│ⓒ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농경사회가 시작되면서 인간들의 세속적인 욕망과 이기심이 불러온 재앙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재앙을 증명하는 자료는 다양하다. 문서, 책, 사진, 영상, 증언…. 재앙의 증명효과를 시각적이고 감성적인 측면에서 극적으로 각인시킬 수 있는 대표 도구가 그림이다. 33세라는 짧은 인생을 살다간 프랑스의 한 화가가 19세기 초에 그린 그림이 좋은 예다. 화가의 이름은 테오도르 제리코(1791~1824), 그림의 제목은 ‘메두사호의 뗏목’이다. 제리코를 프랑스 낭만주의의 선구자 자리에 올린 결정적인 작품이다.
‘메두사호의 뗏목’은 1818~1819년에 걸쳐 완성된 그림이다. 그림의 배경인 비극적인 사건은 1816년 7월 2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 정부가 아프리카 식민지인 세네갈을 통치할 원정선단을 꾸리고 출항한 날이다. 선단을 맨 앞에서 이끄는 호위함은 프리깃 범선 메두사호. 제리코는 바로 이 배에서 벌어진 참혹한 광경을 19세기 낭만주의 그림의 효시로 승화시켰다.
무능한 ‘낙하선 선장’이 지휘하던 메두사호는 항해 도중 암초에 부딪혀 침몰 위기에 빠졌다. 배에는 승조원을 포함해 선발대로 파견되는 군인과 관료, 현지에 정착할 이주민 등 400여 명이 타고 있었다. 구명보트는 여섯 대뿐, 선장과 고급관료, 장교 등 약 250명의 차지였다. 나머지 140여 명은 부러진 돛대를 이용해 급조한 뗏목으로 밀려났다.
뗏목의 유일한 동력(動力)은 구명보트에 연결된 밧줄이다. 그러나 당초 약속과 달리 선장은 뗏목에 탄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인 밧줄을 끊어버렸다. 금방이라도 목숨을 앗아갈 기세로 달려드는 거친 파도를 뚫고 한시라도 빨리 섬이나 뭍으로 달아나야 되는데 뗏목이 걸림돌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리저리 파도에 쓸려 바다에 빠져 죽고, 굶어 죽고, 아귀다툼으로 싸우다 맞아 죽고, 병에 걸려 죽는 등 뗏목 위의 광경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결국 12일 동안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사투 끝에 15명만 살아남는 참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대형 해상인재였다.
해상 참사 눈앞에서 보듯 생생히 고발
무능하고 무책임한 인간이 감투를 쓰면 어떤 파국을 불러일으키는지 생생하게 증언하는 그림이다. 전문성이 없는 무자격자가 지휘하는 배가 정상 운항하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다. 일촉즉발의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 엉뚱한 결정으로 동료들을 사지(死地)로 내몬다. 한 사람이라도 더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아랫사람의 지혜로운 조언은 쇠귀에 경 읽기다. 엉뚱한 결정은 자기만 살겠다는 이기심의 다른 표현이다. 메두사호의 선장이 전형적인 예다. 그에게 ‘선장은 배와 운명을 함께 한다’는 뱃사람들의 금과옥조는 딴 나라 얘기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전시 중인 이 그림은 어마어마한 크기에서 뿜어내는 비장미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세로 491cm에 가로 716cm로 19세기 유럽 열강들의 식민통치 시대에 벌어진 해상 참사를 눈앞에서 보는 듯 생생하게 고발하고 있다. 메두사호는 항해 며칠 후 북서아프리카 대서양 연안의 모리타니 해안 근처에서 암초와 충돌해 좌초 위기에 빠진다. 무지몽매한 선장의 오판 때문이었다. 뗏목에 버려지다시피 한 140여 명에게 남은 것은 천운(天運)에 기대는 실오라기 같은 희망뿐. 먹을 식량도 마실 물도 없는 처참한 상황에서 급기야 시체의 인육까지 손을 대는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다.
제리코는 상황의 극적 묘사를 위해 죽은 자와 죽어가는 자, 살아남은 자들의 모습을 한 화면에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실감나게 그려냈다. 지금 우리는 수평선 저 너머 보일락 말락 희미한 점처럼 나타난 구조선을 보고 “우리가 여기 있다. 살려 달라!”고 절규하는 살아남은 자들의 아우성과 마주하고 있다.
오른쪽 맨 위의 흑인과 바로 아래 남자가 찢어진 옷가지를 들고 처절한 구조의 손길을 뻗고 있다. 그 아래의 남자들도 힘겹게 한 손을 펼쳐들어 애타게 구조선을 부르고 있다. 그것은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기나긴 표류 끝에 기적적으로 구조의 순간을 마주한 살아남은 자들의 가슴 벅찬 환희의 부르짖음이다. 뗏목 위에 널브러진 시체들은 당시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
영웅적 서사 거부, 낭만주의 사조 열어
해부학적 지식 없이는 불가능한 완벽한 인체 묘사, 빛과 그림자를 이용한 뚜렷한 명암대비, 강렬한 색채 구사, 등장인물들의 역동적인 운동감뿐 아니라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사람들의 삶에 대한 갈망과 죽음의 공포 등 절정에 이른 심리 묘사가 우리의 등골을 오싹하게 한다.
그림은 왼편의 돛대와 옷가지를 펼쳐든 흑인을 중심으로 두 개의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를 이루고 있다. 정확한 비례를 강조한 이상적인 인체 표현과 함께 이 두 요소는 신고전주의 기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그림을 낭만주의 화풍의 효시로 내세우고자 한 제리코의 연막에 불과하다.
제리코는 신고전주의 그림의 전가의 보도인 일체의 영웅적 서사를 거부했다. 시체 앞에서 넋이 나간 표정, 부서지고 망가져 금방이라도 물에 잠길 듯한 뗏목, 죽은 자들의 참혹한 모습, 혼신의 힘을 다해 삶에 대한 간절한 의지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산 자들의 몸부림과 같은 고통스럽고 날것 그대로의 감정 전달에 화가로서의 직을 걸었다.
이 그림에 영웅적인 주인공도 없고 영웅적인 행위도 없는 이유다. 이 그림으로 낭만주의라는 새로운 사조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미술의 패러다임(체계)이 바뀐 것이다. 이는 곧 화가들의 자기표현, 즉 주관적이고 개성적이면서 독창적인 정서와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세상이 시작됐음을 의미한다.
낭만주의 미술의 탄생을 알리는 것과 함께 왕정복고에 매달린 샤를 10세 정부의 부패와 무능을 고발하는 정치적 함의를 품고 있는 것도 이 그림의 역사적 평가를 높이는 요인이다.
무엇보다 이 그림을 보는 우리가 실제 사건 현장에 있는 듯한 전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제리코의 투철한 직업 정신 덕분이다. 그는 시체 안치소에 보관된 시체 모습 하나하나를 스케치로 연구하고 뗏목 모형을 제작하는 등 그림의 사실성을 살리기 위해 철저한 사전 준비를 했다.
박인권 문화칼럼니스트_ PIK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전 <스포츠서울> 문화레저부 부장과 한국사립미술관협회 팀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와 사랑에 빠진 그림> <미술전시 홍보, 이렇게 한다>, 미술 연구용역 보고서 ‘미술관 건립·운영 매뉴얼’ ‘미술관 마케팅 백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