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화, ‘부랑 공간’, 캔버스에 유채, 142×335cm, 1999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려서 입 밖으로 내뱉어본다. ‘오~월!’ 오월은 이렇게 한글로 쓰고 읽어야 제맛이 난다. 그리고 반드시 뒤에 느낌표를 찍어야 한다. 동그라미 두 개, ‘ㅇ(이응)’은 읽히지 않는다. 모음 ‘ㅗ(오)’와 ‘ㅜ(우)’가 소리를 만든다. 매력적인 글자 모양 때문일까? 아라비아 숫자로 ‘5월’이라고 쓰면 왠지 진짜 같지 않다. 대신 달력에 새겨진 유난히 많은 빨간색 숫자가 떠오른다.
이런 기념일은 제각기 뜻깊은 날이지만 아무래도 5·18민주화운동을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어느덧 41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사이 많은 것이 변했고 사라졌고 새로 생겨났다. ‘오월’ 뒤에 붙인 느낌표에서 내뿜는 탄식 뜨거웠던 울분도 세월 따라 차츰 식어간다. 아픈 기억과 역사의 상처도 서서히 희미해지고 조금씩 아물어간다. 결국 그 흔적은 숫자로 표기되는 기호로 무뚝뚝하게 남을 것이다. 부디 그 숫자마저 해독 불가능한 암호로 남지 않길 바란다.
민중미술 한복판에서 시대정신 구현
오월을 맞이하는 문턱에서 고인이 된 재벌 회장이 남긴 미술 작품 컬렉션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소장품이 사회에 기증됐다는 사실과 그 작품의 수준과 수량이 엄청나다는 내용의 뉴스다. 새삼스레 놀랄 일은 아니다. 그 재벌가(家)의 미술 컬렉션 내력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니까. 창업주 선대 회장은 고미술품을 수집했고 며느리이자 고인이 된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은 근현대미술 작품을 대거 사 모았다. 이들이 구입한 컬렉션은 국내에선 비교할 대상이 없고 자타 공인 세계적인 수준이란 소문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자초지종은 접어두고 누군가는 해야 했을 일을 그들이 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일제강점기에 간송(澗松) 전형필이 그랬던 것처럼. 같은 맥락에서 그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시대정신(?)’을 구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시시비비를 따질 판단 역시 여전히 열려 있다. 따라서 ‘시대정신’이란 말을 감히 재벌가의 유산상속과 기증에 빗대어 꺼내기가 몹시 조심스럽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과는 차원이 다른 대척점에서 시대정신을 구현한 화가를 소개한다. 1980년대 민중미술의 한복판에서 열정적으로 ‘시대의 표정’을 그려낸 작가 최민화다.
최민화는 1980년대 한국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1954년 태어난 최민화의 원래 이름은 최철환. 1982년부터 백성 민(民), 꽃 화(花) 자를 써서 이름을 바꿨다. 동음이의어로 민화(民畵), ‘민중의 그림’으로 읽히기도 한다. 이름처럼 그는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며 현실 정치 상황이 적극 반영된 ‘민중미술’을 지향했다.
‘부랑아’ 혹은 ‘양아치’로 상징되는 애잔한 청춘의 모습을 인물화와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현장을 사실적으로 기록한 회화작품을 여러 점 그렸다. 어려서부터 화가의 꿈을 키워온 최민화는 홍익대학교에 진학했지만 제도권 미술계에 스스로 편입되지 않았다. 대신 거리의 미술, 현장의 미술을 지향했다. 1980년대 맞닥뜨린 암울한 사회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87년 6·10민주항쟁 당시 이한열 장례식에 사용된 가로 8m 크기 대형 걸개그림 ‘그대 뜬 눈으로’를 하룻밤 만에 그린 사람이 바로 최민화다. 경찰에 의해 훼손돼 사진으로만 남아 있는 이 그림은 당시 최민화가 현장미술가로서 얼마나 치열하게 활동했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최민화, ‘그대 뜬 눈으로’, 캔버스에 아크릴릭, 페인트, 250×830cm, 1987
▶최민화, ‘파쇼에 누워Ⅰ’, 캔버스에 유채, 136×206cm, 1991
주관적 색채의 탄생 ‘분홍’
이후 최민화는 사회변혁의 도구로 활용된 현장미술의 한계를 극복한다. 그동안 내면에 간직했던 색채감각과 솜씨를 맘껏 발휘하며 풍부한 형상성을 발산한다. 민중미술 계열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분홍(粉紅) 연작’이다. ‘분홍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을 작가는 이렇게 밝힌다.
“1980년대에 시위 나가면 진압 경찰들이 최루탄을 쏘는데, 정말 고통스럽잖아요. 눈물, 콧물 질질 흘리면서 도저히 고통스러워서 견디질 못해요. 그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해 미리 자기최면을 걸어두는 거예요. … 보통 시위대들은 빨갱이라고 하고 이를 진압하는 세력은 백색으로 이야기하잖아요? 저는 시위대와 같은 편인 빨간색인데 붉은 무리 속으로 하얀 최루탄이 팡 터지는 거죠. … 빨간 우리는 이 상황을 포용함으로 해서 그러니까 붉은색이 고통을 이겨내고 궁극적으로는 흰색을 이겨낼 것이다. 이런 자기최면을 걸어두는 거지요. 빨간색 안으로 흰색이 와서 터지는 …, 분홍색이 만들어지는 상황을 미리 머릿속에서 그려요. 그렇게 분홍색이 만들어지는 상상을 함으로써 최루탄이 주는 고통을 어느 정도 주관적으로 마비시키는 거죠.…”
극단적인 이념의 징표였던 ‘빨간색’은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다의적으로 해석되고 이용된다. 이런 빨간색을 분홍이라는 독특한 색채로 번안한 최민화의 ‘분홍 연작’은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돋보이는 회화적 성취를 평가받는다. 이에 앞서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민중미술 15년전>을 계기로 민중미술은 한국 미술사의 중요한 한 장면으로 공인됐다.
2000년 새로운 밀레니엄 이후 세상은 급변했다. 60대 중반을 훌쩍 넘긴 최민화의 근작도 이와 같은 거대한 역사의 큰 흐름이 반영되고 있다. 현실 정치의 그늘에서 탄생했던 비판적 리얼리즘을 넘어 고대 설화와 인문학적 사유가 바탕이 된 서사적 리얼리즘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준희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겸임교수_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창작에서 전향해 몇 년간 큐레이터로 일했고, 미술 전문지 <월간미술>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까지 맡아 18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것보다 여전히 아티스트에 가까운 ‘미술인’으로 불리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