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숙, ‘안’, 한지 위에 먹지로 드로잉, 채색, 종이판화, 110×90cm, 2020
▶홍인숙, ‘녕’, 한지 위에 먹지로 드로잉, 채색, 종이판화, 110×90cm, 2020
시간은 요물(妖物)이다. 시간처럼 묘한 게 또 있을까?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것 같지만 사람마다 체감이 다르고 객관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지극히 주관적인 게 시간이다. 이런 시간은 절대 멈추지 않는다. 어디론가 항상 흐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간을 직선으로 생각한다. 과거에서 현재를 지나 미래로 향하는 화살표처럼 느낀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시간은 한 방향으로 쭈~욱 그어진 직선이 아니다. 미래에 벌어질 시간·사건은 예측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어느 방향으로 흐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까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사방팔방으로 팽창하는 구(球)에 가깝다. 따라서 현재라고 착각하는 ‘지금 이 순간’ 역시 직선 위에 위치하는 점(點)이 아니라 팽창하는 구(球)의 표면 어디쯤 일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현재라는 시간은 없다. ‘지금’을 현재라고 자각하는 순간! 그 시간마저 곧 과거가 돼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찰나(刹那)의 순간으로 존재했던 ‘지금’을 현재로 착각하는 셈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시간의 경계는 불분명하다. 과거-현재-미래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분명한 사실은 현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위치한다는 것 뿐. 그리고 과거의 시간은 기억으로 되살아나고 미래는 상상으로 그려진다. 이건 미술에서도 마찬가지다. 많은 작가들이 과거-전통에서 비롯된 기억과 미래-상상력을 동원해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만든다. 작가 홍인숙의 작품이 좋은 예다.
시간처럼 경계가 불분명한 그림
홍인숙의 그림은 요술(妖術)같다. 무엇보다 재밌다. 어렵지 않고 쉽고 예쁘기도 하다. 이것 같기도 하고 저것 같기도 하다. 여기서 ‘이것, 저것’이란 그림 같기도 하고 글씨 같기도 하다는 얘기다. 홍인숙 작품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미지와 텍스트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림이다. 홍인숙의 작품은 글씨가 그림으로 보이고 그림이 글자로 읽히기도 한다. 물론 한글을 모르는 사람에겐 그림으로 보이겠지만 홍인숙의 작품은 그림이면서 동시에 글씨로 읽히고 글씨이면서 그림처럼 보인다. 그래서 요술(妖術) 같다고 한 것이다.
2020년 11월,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있는 갤러리 교보아트스페이스에서 홍인숙의 개인전이 한달간 열렸다. 전시제목은 ‘안, 녕’. 코로나19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평안을 기원하는 인사 ‘안녕’은 ‘글자 풍경화’로 잘 알려진 홍인숙 작품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안녕’ 외에도 ‘뿅’ ‘밥’ ‘집’ ‘책’ ‘고마워’ ‘사랑해’ ‘러브’ 같은 따뜻하고 재치 있는 그림·글씨 작품을 선보였다. 특히 작품 ‘안’과 ‘녕’은 교보문고 종이가방에 인쇄돼 책을 산 사람들이 들고 다니기도 했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판화를 전공한 홍인숙은 자신만의 고유한 표현기법을 개발(?)했다. 한지 위에 먹지를 대고 밑그림을 그리고 가위로 오려서 여러 모양으로 만든 종이판 위에 물감을 칠한 후 압축기로 찍어내는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한다. 판화 방식으로 그림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붓으로 물감을 직접 색칠하는 일반적인 회화와는 전혀 다른 독특한 색감을 보여준다.
꽃다발이나 나무, 담벼락, 구름 등 그림에 등장하는 모티프를 자세히 보면 그 모양이 똑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마치 도장에 인주를 묻혀 찍어내듯 종이로 오려낸 그림판을 위치를 바꿔가며 반복적으로 찍어서 형상을 만들었다. 포토샵 같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복사(ctrl+c)해서 붙여넣기(ctrl+v)’를 하면 손쉽게 할 수도 있는 방법이지만 홍인숙은 여전히 아날로그 방식을 고집한다. 번거롭고 힘들지만 이런 노동을 감내하며 세상에 단 하나뿐인 유일한 작품을 만들어 낸다.
▶홍인숙, ‘글자풍경-러브’, 한지 위에 먹지로 드로잉, 채색, 종이판화, 130×96cm, 2021
전통을 뛰어넘는 현대감각의 문자도
작가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추억의 이미지와 일상에서 발견한 소소한 소재를 결합해 단순하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홍인숙의 작품은 조선시대 민화(民畵) 중에서 특히 문자도(文字圖)와 견주어 설명되기도 한다. 타당한 해석이다.
당시 조선사회에서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던 유교적 덕목 즉, ‘충(忠)효(孝)예(禮)의(義)염(廉)치(恥)’ 같은 글자의 뜻을 그림으로 형상화한 게 문자도다.
같은 맥락에서 홍인숙이 무심한 듯 툭~ 내뱉는 짧은 글자 역시 동시대 풍경을 함축적으로 담아내는 현대적 감각의 문자도임에 틀림없다. 특히 한글은 그 자체로 뜻을 지닌 한자와 달리 자음과 모음이 결합되고 받침이 붙기도 하면서 자유자재로 조합된다.
홍인숙의 그림에선 한글의 과학성 못지않게 자유로운 조형성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아마도 알파벳을 이런 식으로 조합하면 한글처럼 풍부한 맛이 절대로 나지 않을 것이다.
불과 수십 년 전 만하더라도 미술계뿐만 아니라 문화예술계의 거의 모든 분야에선 ‘전통’이나 ‘한국성’ 같은 무거운 주제가 창작의 중요한 덕목이었다. 심지어 이것에 대한 사명감을 공공연하고 비장하게 드러내는 예술가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요즘은 미술대학 학생들도 이런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다. 말 그대로 글로벌한 세상이 된 것이다. 대신 그 자리를 ‘K-컬처’라는 슬로건이 차지했다. 그럼에도 홍인숙의 한글-글씨-그림은 여전히 전통과 한국성에 대한 고민과 비평적 가치가 유효함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포스코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 <예술가로 사는 것>에서 홍인숙의 작품 여러 점을 볼 수 있다. 전시는 4월 27일까지.
이준희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겸임교수_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창작에서 전향해 몇 년간 큐레이터로 일했고, 미술 전문지 <월간미술>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까지 맡아 18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것보다 여전히 아티스트에 가까운 ‘미술인’으로 불리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