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홍, ‘폭풍이 지나간 후’, 캔버스에 유채, 133×354cm, 2020년, 운중화랑 소장
봄은 꽃이다. 꽃 소식으로 봄은 시작된다. 봄꽃 소식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아래부터 위로 올라온다. 가을 단풍은 반대다. 북에서 남으로, 위부터 아래로 내려간다. 단풍이 망원경이라면 봄꽃은 현미경 같다. 멀리서 넓게 조망해야 만끽할 수 있는 단풍과 달리 봄꽃은 가까이에서 들여다봐야 제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봄꽃은 앞다퉈 차례로 핀다. 눈 속에서 꽃망울을 터뜨린다는 복수초를 시작으로 유채, 수선화, 산수유, 매화, 개나리, 진달래, 벚꽃까지.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문턱에 피는 라일락은 쉼표 같다. 5월 중순 무렵, 어스름한 초저녁 가벼운 바람결에 실려 오는 라일락 향기는 여름을 알리는 전령이다. 아무쪼록 하루빨리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는 일상이 회복되길…. 그래야 시시각각 피어나는 꽃향기를 코끝으로 체감할 수 있을 테니.
동서고금 가릴 것 없이 수많은 예술가가 꽃을 소재로 다뤄왔다. 특히 색채를 다루는 화가에게 꽃은 매력적인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의 모든 화가는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두 가지 주제의 그림을 그렸을 게다. 하나는 자화상이고 나머지 하나는 꽃 그림이다.
단언컨대 자화상을 그리지 않은 화가는 없다. 마찬가지로 꽃을 한 번쯤 그려보지 않은 화가 역시 없을 게다. 화가가 자화상을 그리는 이유는 명확하다.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리고 꽃 그림은 자연에 대한 감흥을 표출하는 방식이다. 자화상은 자신에 대한 내밀한 표현이라면 꽃 그림은 세상을 조망하는 일이다. 그러니 반복해 비유하자면 자화상은 현미경이고, 꽃 그림은 망원경과 같다. 이 둘을 자유자재 능숙하게 활용하는 화가가 있다. 안창홍이다.
▶안창홍, ‘자화상’, 종이에 아크릴물감, 1002×70cm, 1998년
형상미술의 독보적 대표 작가
안창홍은 우리 미술계에서 아주 각별한 존재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영혼과 확고한 작품 세계를 지닌 작가다. 지난 50여 년간 보여준 이력이 이를 증명한다. 안창홍은 지금까지 어떠한 제도나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 자존심을 지켜오며 오직 화가로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왔다. 그것은 마치 묵묵히 수행해온 구도자의 자세와 다르지 않다.
1953년 밀양에서 태어난 안창홍은 미술대학을 나오지 않았다. 스스로 정규교육을 거부한 것이다. 어릴 때 독학으로 미술 공부를 했다. 학벌과 인맥을 중시하는 미술계에서 이런 성장 배경은 작가에게 단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약점은 반대로 어떤 작가보다도 큰 장점이기도 하다. 제도화된 미술교육은 화가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옭매는 역기능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안창홍이 이룬 성과는 독보적이고 그 정서는 매우 한국적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다’라는 식상한 명제가 아니더라도 그의 작품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차별되는 독창성을 보여준다. 안창홍은 오랫동안 인물화에 천착했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근현대사에서 주목받지 못한 소외된 사람들이다. 특히 자화상과 ‘가족사진’을 많이 그렸다.
이런 배경엔 질곡 많은 가족사가 자리 잡고 있다. 우리 사회의 현실이 반영된 그의 인물화는 ‘시대의 초상화’이기도 하다. 안창홍은 1980년대 민중미술을 상징하는 대표적 미술 그룹 ‘현실과 발언’ 멤버였지만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작품의 영역을 넓혔다. 젊은 시절, 부산 지역에서 활동하며 ‘형상미술’이라는 영역을 개척하기도 했다. 1989년 경기도 양평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지금까지 전업 작가로 생활하고 있다.
▶안창홍, ‘가족사진’, 종이에 색연필, 76.2×114cm, 1981년
아름다움 넘어서 생명력이 반영된 꽃
안창홍의 그림, 특히 인물화는 직설적이고 힘이 세다. 노골적일 만큼 직접적이다. 이미지도 선명하고 색채도 화려하다. 그래서 간혹 보기 불편하다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독특함 때문에 그의 그림을 좋아하는 마니아, 즉 수집가(컬렉터)도 많다. 자칫 대중성과 거리가 먼 것 같지만, 현대적 감각과 장식성을 충분히 지녔기에 미술시장에서도 호응이 크다. 이 가운데서도 인물화 못지않게 꽃밭 시리즈가 인기 높다. 아무래도 꽃 그림은 인물화보다는 덜 자극적이기에 그러리라.
실제로 실내에 걸어두고 보기에도 거부감 없이 좋다. 그럼에도 안창홍은 꽃 그림을 마냥 예쁘고 보기 좋게만 그리지 않는다. 아름다운 꽃의 겉모양을 단순히 재현하는 차원이 아니다. 그 속에 담긴 생명력, 삶과 죽음에 대한 은유를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핏빛보다도 검붉은 맨드라미와 아마란스를 즐겨 그리는데, 이 꽃들은 작가가 직접 작업실 정원에 만든 꽃밭에서 키운 것이다.
꽃 그림 <폭풍이 지나간 후>는 제목처럼 거센 폭풍과 세찬 비바람이 지나간 후 꽃밭을 그린 작품이다. 쓰러지고 꺾였을지라도 그 역경을 꿋꿋이 버텨내고 화려함을 내뿜는 아마란스의 생명력을 장엄하게 그려냈다. 유화물감으로 그린 원작은 가로 354cm, 세로 133cm 크기인 대작이다. 안창홍은 이보다 훨씬 큰 크기의 인물화를 많이 그렸지만 꽃 그림을 이렇게 크게 그린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래서 절반 크기 판화로 다시 제작해 에디션(한정된 수로 제작돼 판매되는 작품) 100장을 찍었다. 원화 느낌과 컬러를 그대로 구현하기 위해 실크스크린 판을 무려 43개나 사용했다. 최근엔 부조와 입체, 판화 외에도 새로운 영역인 ‘디지털 회화’ 작업에 전념하고 있다.
이준희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겸임교수_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창작에서 전향해 몇 년간 큐레이터로 일했고, 미술 전문지 <월간미술>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까지 맡아 18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것보다 여전히 아티스트에 가까운 ‘미술인’으로 불리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