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중심의 르네상스 정신 이상적으로 구현

2021.03.01 최신호 보기
▶산드로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캔버스에 템페라, 172.5×278.5cm, 1485경,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소장│ⓒ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르네상스는 14세기부터 16세기 사이 북이탈리아에서 시작돼 유럽 일대를 휩쓴 인간 중심의 문화 부흥 운동이다. 르네상스의 출발지가 이탈리아였던 만큼, 르네상스 미술의 개화(開花)도 이탈리아에서 시작됐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초기 미술 중 가장 눈여겨볼 작품으로는 ‘비너스의 탄생’(1485년경)이 첫손에 꼽힌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산드로 보티첼리가 마흔 살 무렵에 그린 ‘비너스의 탄생’은 고대 그리스·로마신화의 서사를 종교적인 시각이 아닌, 미학적인 관점에서 여성의 아름다운 신체를 완벽하게 재현했다는 점이다. 특히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남자가 아닌 여자의 알몸을 표현했다는 점이 파격적으로 평가된다.
또 다른 하나는 동시대의 르네상스 미술에서 보이는 고전적인 사실주의 기법과 해부학적 묘사를 지양(止揚)했다는 점이다. 대신 보티첼리는 예술적 상상력과 자신만의 미적 감각을 동원해 인체를 왜곡시키는가 하면, 상징적이고 장식적인 시도를 통해 ‘미의 여신’ 비너스의 신체적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는 혁신적인 화풍(畵風)을 선보였다.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 정신을 이상적으로 구현한 ‘비너스의 탄생’은 도상학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그림 속에 다양한 의미를 숨겨놓았기 때문이다.
보티첼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년)와 동시대 인물이다. 다빈치보다 7년 앞선 1445년 피렌체에서 가축의 모피를 다루는 제혁(製革)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10대 후반에 미술에 입문했다. 보티첼리의 이름과 관련한 흥미롭지만 아리송한 뒷얘기 한 토막. ‘보티첼리’는 본명이 아니다. 보티첼리의 본명은 알레산드로 디 마리아노 필리페피다. 보티첼리는 원래 몸집이 작고 뚱뚱했던 형의 별명 ‘작은 술통’이란 뜻인데, 언제부터인가 필리페피 대신 보티첼리가 본명처럼 굳어졌는데 그 이유는 알려진 바가 없다. 보티첼리는 1510년 자신이 태어난 피렌체에서 6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여성 누드화의 선구적 본보기상
보티첼리의 대표작인 ‘비너스의 탄생’은 그의 또 다른 걸작 ‘봄’(1481~1482년)과 함께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우피치미술관에 전시 중인 작품이다. 제목처럼 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는 사랑과 미의 여신 비너스의 탄생 이야기를 내세워 여성의 신체에서 발산되는 아름답고 고혹적인 자태를 신비롭게 묘사한 그림이다. 여성을 미적 표현의 대상으로 삼아 금욕 지향의 중세 기독교의 금기에 반기를 든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여성의 누드를 신화 속 인물을 차용해 과감하게 그림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회화사의 혁명으로 기록되고 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이 그림이 뭐 그리 특별한가? 고개를 갸우뚱거릴 만하지만 15세기 후반 당시로서는 파격 그 자체였다. ‘비너스의 탄생’ 이전까지 그림의 주제는 철저하게 기독교 사상이 잉태된 종교적인 내용이 지배적이었다. 예술과 종교의 일심동체가 당연시되던 당시 종교 외적인 소재를 그림으로 다루는 일은 언감생심, 그것도 실물 크기의 여성 누드라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비너스의 탄생’을 계기로 화가들은 종교적으로 금기시되던 인간의 욕망을 자유롭게 그릴 수 있게 됐으며, 여성의 원초적인 모습을 미적 탐구의 기준으로 캔버스에 담을 수 있는 새 시대를 맞게 됐다. ‘비너스의 탄생’은 후대 화가들에게 여성 누드화의 선구적 롤 모델(본보기상)로 칭송받았을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림 가운데 거대한 크기의 조개껍질이 바닷가에 떠 있다. 조개껍질을 살포시 밟고 알몸으로 서 있는 여성이 비너스다. 세상에 막 탄생한 비너스가 조개껍질에 실려 그리스의 키테라섬에 도착하는 장면이다. 비너스의 탄생 모티브(작가의 중심 사상)는 그리스 신화에서 따왔다. 자식들을 무참히 살해한 하늘의 신 우라노스의 폭압에 분노한 어머니이자 아내인 대지의 신 가이아가 그녀의 또 다른 아들 크로노스에게 우라노스를 살해할 것을 명령했다. 그 결과 바다에 버려진 우라노스의 생식기 주변에 거품이 일었는데, 이 거품에서 한 생명체가 탄생했다. 그가 바로 비너스다. 실제로 비너스의 그리스식 이름 아프로디테는 거품이라는 뜻의 아프로스에서 유래됐다.
 
사실적 묘사 대신 미적 감각과 상상력 발휘
그녀는 현실 세계에서는 불가한 10등신의 빼어난 몸매를 자랑한다. 그런데 비너스의 신체 특정 부위 몇 군데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목에서 시작해 왼쪽 어깨를 지나 왼팔과 왼손에 이르기까지, 해부학적으로 정상적인 비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비너스의 목을 보라. 목의 길이가 지나치게 길다. 손까지 이어지는 왼쪽 팔의 길이도 마찬가지다. 왼쪽 어깨의 기울어진 각도도 지나치게 가파르다. 보티첼리가 엄격한 사실적 묘사 대신 본인만의 미적 감각과 상상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비너스의 전체적인 신체 비율은 고대 그리스의 황금비율(1대1.618)을 능가할 정도로 완벽한 10등신의 이상적인 몸매로 구현됐다. 보티첼리가 상상력을 동원해 빚어낸 비너스의 몸매는 그래서 후대 화가들에게 아름다운 여성상의 전범(典範)으로 굳어진 것이다. 또한 비너스의 육감적이고 백옥같이 흰 피부가 자아내는 오라(기품)는 에너지로 똘똘 뭉친 활기를 뿜어내는데, 날카롭게 각진 오른 팔꿈치와 윤곽선이 뚜렷하게 휘어진 오른 다리의 바깥 부분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화면 왼쪽의 남자는 ‘서풍의 신’ 제피로스. 제피로스는 자신의 연인이자 봄의 여신인 클로리스와 함께 입으로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비너스를 뭍으로 밀어 올리기 위해서다. 화면 오른쪽에 화려한 꽃무늬 장식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인은 ‘계절의 신’ 호라이다. 호라이는 어서 빨리 알몸을 가리라는 듯, 메디치 가문을 상징하는 무늬가 새겨진 망토를 비너스에게 걸쳐주고 있다.
‘비너스의 탄생’은 망토의 무늬와 그림이 메디치 가문의 별장에 걸려 있었다는 이유로 보티첼리가 메디치가를 위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비너스의 실제 모델이 당시 피렌체가의 미모의 여인 시모네타라는 주장도 있다.

 박인권 문화칼럼니스트_ PIK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전 <스포츠서울> 문화레저부 부장과 한국사립미술관협회 팀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와 사랑에 빠진 그림> <미술전시 홍보, 이렇게 한다>, 미술 연구용역 보고서 ‘미술관 건립·운영 매뉴얼’ ‘미술관 마케팅 백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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