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월 10일 새해 기자회견에서 고용지표 부진이 “가장 아픈 대목”이라면서도 정책 기조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보완하겠다”고 밝혔다. 한발 더 나아가 올해 목표가 “국민의 삶 속에서 정부 경제정책이 옳은 방향임을 확실히 체감하도록 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여기서 말한 정책 기조는 ‘포용국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포용적 성장’이 뭐길래 문 대통령은 이토록 흔들리지 않는 것일까?
왜 포용국가인가
과거에는 경제성장과 소득분배는 상충관계에 있는 것으로 인식됐다. 1975년 미국의 경제학자 아서 오쿤은 성장을 이끄는 효율성과 분배를 의미하는 형평성 사이에 역의 관계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이와 상반되는 연구 결과들이 발표됐다. 과도한 소득격차가 되레 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요지다.
2010년대 들어서는 효율성과 형평성이 보완관계에 있다고 보는 포용적 성장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포용성장론은 시장지상주의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다. 고삐 풀린 자본주의는 금융위기와 장기불황, 부의 소수 집중과 실업 증가 등 숱한 폐해를 낳았다. 포용성장론은 경제성장의 속력뿐만 아니라 방향도 중요하다고 봤다. 사회 구성원 전체에 기회가 공평하고 결과가 공유됨으로써 불평등을 완화하고 약자를 포용하는 성장에 초점을 맞췄다.
시장 기능 강조 IMF도 뜻밖의 연구 결과 내놔
포용성장론의 산실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국제기구들이다. 2009년 세계은행은 다양한 사회계층에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성장을 내세웠다. 다만 정책의 초점을 절대적 빈곤의 해소에 맞춰 성장의 속력을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OECD 등이 채택한 포용성장의 개념과는 다소 결이 다르다. 개발도상국 지원이 주요 업무인 세계은행으로서는 분배보다는 성장에 방점을 찍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시장 기능을 강조해온 국제통화기금(IMF)이 뜻밖에도 2011년 이후 포용적 성장을 강력히 주장하는 연구 결과를 내놓으면서 포용성장론은 세계적인 화두로 떠올랐다. IMF는 2014년 발표한 논문에서 소득분배의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가 낮을수록 경제성장률이 높다고 분석했다. 포용성의 확대가 불평등을 완화함과 동시에 성장에 기여한다는 논리다.
정부의 재분배 정책이 발달한 유럽 국가가 중심인 OECD는 2010년대 초반부터 포용적 성장을 대표 의제로 삼았다. 특히 국내총생산(GDP)만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교육 수준, 건강상태, 환경, 시민들의 정치적 참여, 사회적 연대와 같은 요소들에 주목해 포용적 성장을 측정하는 ‘삶의 질’ 지표를 개발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새해 기자회견에서 “국가 경제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삶이 고단한 국민들이 여전히 많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OECD의 2014년 보고서 한 대목을 읽어보면 그 이유가 잘 설명된다. OECD는 이 보고서에서 “국민경제의 성장이 사회 구성원 전체의 후생 증대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으며, 경제성장의 과실이 상층부 엘리트에게만 집중될 경우 성장도 지속 가능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문 대통령 역시 “경제성장의 혜택이 소수의 상위계층과 대기업에 집중되었고 모든 국민에게 고루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따라서 포용국가의 두 날개인 성장과 분배로 극심한 부의 양극화와 불평등을 반드시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거듭 확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OECD “부 편중 땐 성장 지속 어려워”
그렇다면 포용 성장론이 제안하는 사회정책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포용적 성장을 주창하는 국제기구들은 노동과 교육제도는 물론 창업 기회 확대와 금융자산 지원에 이르기까지 불평등 격차를 줄일 수 있는 다양한 제안을 내놓았다.
OECD와 세계은행은 2017년 포용적 성장을 위한 정책으로 우선 노동시장의 성별 격차 축소를 제시했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확대를 위해 육아수당과 유급 휴직은 물론 여성 고용을 제약하는 제도적·심리적 장벽의 완화, 연봉 협상과 승진 심사에서 성차별적 요소의 시정을 권고했다. 노동 분야에서는 취약계층 지원에 초점을 맞춰 실직자가 새 일자리를 구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실업수당과 노동시장 재진입 교육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IMF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고용 보호 수준의 차이를 줄이는 정책에 중점을 뒀다.
교육 분야에서는 기회균등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교육과 직업훈련 과정에 대한 접근성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져야 한다. 특히 빈곤의 대물림 가능성을 낮추기 위해 유아기에 교육 기회를 확대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조언한다. 예를 들어 미국 정부는 저소득 가구 아이들에 대한 보육서비스 접근성 제고와 취학 전 조기교육 프로그램 실시에 정책의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사회 이동성을 향상시키는 고등교육 기금, 저숙련 기술 인력에 대한 평생교육도 불평등 확대를 줄이는 데 중요한 요소로 고려했다.
보건 부문에서는 건강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동등한 의료서비스 제공 등 다양한 개혁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IMF도 장애인과 저소득층에 집중한 보건서비스 제공에 역점을 둘 것을 권고했다.
▶포용적 성장을 위해선 육아수당과 유급 휴직 등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확대가 필수적이다. 2018년 11월 8일 고양 킨텍스에서 열린 제29회 맘앤베이비 엑스포에서 관람객이 아기 침대를 살펴보고 있다. | 연합
재산세 늘리고 사회보장 정책 강조
OECD는 소득 불평등을 개선하는 효과적인 방안으로 조세와 재정 정책을 꼽았다. 누진적 성격을 지닌 재산세와 상속세를 확대하고 부가가치세처럼 역진적 성격을 지닌 간접세는 축소할 것을 권고했다. 취약계층을 지원하는 재정 방안으로는 실업보험 확대와 조건부 현금지급 등을 제시했다. IMF도 누진세제와 재정지출, 촘촘한 사회안전망을 대책으로 꼽았다.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 포럼)은 정부 재정으로 운용되는 사회보장 정책이 저소득층의 노동시장 재진입 등을 통해 포용적 성장의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금융 부문은 포용적 성장에 긴요한 젖줄이 된다. IMF는 자산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저소득 가구의 금융 교육에 중점을 둬야 한다고 권고한다. 금융서비스 접근성이 불평등하면 소득 하위자로 갈수록 단순한 저축에 의존해 충분한 인적자본 형성이나 투자를 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반면 금융서비스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소득 상위자들은 투자를 통해 더 높은 소득과 자산 형성의 기회를 얻는다. OECD는 자원을 생산적 활동으로 전환하는 공평한 금융시장을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든 기업이 자금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의 보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금융의 디지털화는 이런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OECD와 세계은행은 한국이 포용적 성장을 하기 위해 필요한 정책도 제시했다. 먼저 부당 해고에 대한 시정 조치의 신속화, 최저임금 인상, 사회보장 확대,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한 직업훈련 프로그램 강화 등을 강조했다. 반면 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보호는 축소해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완화하도록 권고했다. 근로장려세제(EITC) 확충과 저숙련 고령 노동자를 위한 직업훈련 확대도 제안했다. 국민연금 보장 범위와 기초연금의 확대 방안도 제시됐다. 마이스터고 시스템 확장을 장려한 점도 눈길을 끈다. 육아 시설에 대한 승인·인가 제도를 의무화하고 육아휴직 확대를 위한 방안도 잊지 않았다. 이러한 사회보장 지출 확대를 위해서는 세율을 높이고 환경세와 재산세를 도입할 것을 제안했다. 이우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들이 제시한 일부 정책들 사이에는 상호 모순되는 측면도 있어 우리 현실에 맞게 선별해야 한다”고 짚었다.
자산 불평등이 소득 불평등보다 심각
국내에서도 포용적 성장에 관한 논의가 점차 활발해지고 있다. 저성장과 더불어 소득 불평등도 악화일로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은 외환위기 이전 8%대에서 2000년대 약 5%, 최근에는 2~3% 수준으로 계속 하락하고 있다. 또한 상위 10%의 평균 실질소득은 가파르게 증가하는 반면, 하위 10%의 실질소득은 IMF 이전보다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많은 연구자들은 소득 불평등의 근본 원인이 노동소득의 불평등에 있다고 분석했다. 가구주의 경제활동 여부가 불평등의 확대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줬고, 비정규직 증가 같은 고용 형태의 변화나 자영업자의 쇠락이 소득 양극화를 불렀다. 따라서 정규직-비정규직과 대기업-중소기업 사이의 임금격차를 바로잡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자산 불평등이 소득 불평등보다 더 심각해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자산소득의 불평등도가 노동소득의 불평등도보다 훨씬 크며 전체 소득 불평등에 미치는 비중이 점점 높아지는 추세에 있다는 것이다.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에서 자산소득의 불평등이 증가하면서 자본의 수익률(r)이 경제성장률(g)을 앞지르게 되고 세습자본주의 사회로 회귀할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우리나라의 불평등 현실에 비춰 포용적 성장을 위해서는 복지지출의 확대가 관건이다. 국내 연구자들은 경제와 사회 전반에 걸친 포용성의 확대를 강조한다. 교육, 의료, 노동 분야의 재정지출을 망라하고 누진적 조세체계를 더할 때 재분배와 성장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은 <포용적 성장과 재정정책> 보고서에서 “인적자본, 중소기업, 출생률, 삶의 질과 같은 광범위한 경제·사회적 변수들을 고려해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광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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