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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과 2017년에 걸쳐져 있던 겨울, 시민들은 한 손에는 촛불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이게 나라냐’라는 질문을 들고 거리에 나왔다. 이 질문의 힘은 강력했다. 헌법에 따라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로 구성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이 질문에 답해야만 했다. 국회는 탄핵소추안을 가결했고,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을 탄핵했다. 촛불의 힘으로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의 첫 취임 일성은 ‘나라다운 나라’였다. 그리고 2018년 9월 정부가 꺼내 든 ‘혁신적 포용국가’라는 국가 비전은 ‘이게 나라냐’는 국민들의 근본적 물음에 대한 대답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
대통령직속 정책기획위원회가 발표한 ‘혁신적 포용국가’는 소득 불평등 완화와 노동시장 격차 해소 등 정부가 추구할 사회정책 비전으로서 제시됐다. 하지만 현재 발표된 사회정책 비전으로서의 ‘혁신적 포용국가’는 아직 일부분만 드러난 것일 뿐이다. 혁신적 포용국가의 밑그림을 그린 김연명 청와대 사회수석은 “혁신적 포용국가는 사회정책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경제정책과 정치개혁이 포함돼 사회, 경제, 정치가 어우러진 종합적인 국가 비전으로서 ‘혁신적 포용국가’ 전략의 전체적인 윤곽이 곧 드러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책기획위원회 등 청와대와 기획재정부 등 각 정부 부처는 문재인 대통령 취임 2주기가 되는 올해 5월까지 포용국가의 나머지 퍼즐들에 대한 구체적 전략과 로드맵을 수립해 포용국가의 전체적인 청사진을 밝힐 계획이다.
‘포용국가’ 이전에 ‘헬조선’이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4주년인 2017년 2월 25일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촉구 촛불집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박종식 <한겨레> 기자
포용국가에서 말하는 ‘포용’은 개념적으로 ‘차별’과 ‘배제’의 반대말이라 한다. 지금 이 시점에 왜 정부는 포용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지금은 다소 낡은 감이 있지만, 한때 젊은 세대에게 ‘헬조선’이란 말이 유행했다. 지옥(헬·hell)과 한국을 뜻하는 ‘조선’이 합쳐진 말이다. ‘헬조선’이란 표현이 널리 유행했다는 것은 이 시대 젊은이들이 자신들이 살아가는 사회와 자신들이 처한 조건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말이 널리 유행하던 시절 당시 최고 권력자는 젊은이들에게 ‘노오력’을 하라고 답했다가 화만 돋웠다. 사실 ‘헬조선’에 대한 인식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를 목도한 시민들이 ‘이게 나라냐’라는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 전제였다. 권력층의 부정·부패, 재벌·대기업 총수와 정치권력의 유착과 비리 속에서 정의, 민주주의, 공정, 평등 같은 고상한 가치가 아닌, ‘금수저’와 ‘흙수저’로 대변되는 그들과 나의 존재론적 인식은 ‘헬조선’이란 프레임을 통해서만 설명할 수 있었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의 ‘포용국가’는 이곳이 ‘헬조선’이라는 국민들의 분노에 대한 대답이 되어야만 한다.
왜 포용국가여야 하는가? 포용국가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헬조선’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만 한다. ‘헬조선’이란 단어는 갑자기 툭 튀어나온 유행어는 아니다. 앞서 ‘N포 세대’라는 말이 유행했다. 처음 등장한 것은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했다는 ‘3포 세대’라는 말이다. 이후 여기에 더해 취업과 내 집 마련을 포기했다는 ‘5포’로 넓어지더니, 인간관계와 희망을 포기했다는 ‘7포’, 건강과 외모까지 포기했다는 ‘9포’ 등으로 한없이 확장됐다. 아무리 많은 것을 포기해도 삶이 나아지기는커녕 더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개인의 노력으로는 물론, 심지어 포기를 통해서도 해결될 수 없는 삶의 지속 불가능성은 ‘헬조선’이라는 사회구조적 문제를 인식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국민의 삶은 국가가 책임진다
2018년 9월 정부가 발표한 ‘혁신적 포용국가’는 한마디로 말하면 ‘국민의 삶은 국가가 책임진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2018년 9월 6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18 포용국가 전략회의에서 포용국가 비전을 발표하면서 “이제 국가는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 국민들의 삶을 전 생애 주기에 걸쳐 책임져야 한다. 그것이 포용국가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이날 정부는 포용국가에 도달하기 위한 △사회통합 강화 △사회적 지속가능성 확보 △사회혁신 능력 배양 등 3대 비전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 3대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세부적인 정책목표로 9대 전략을 선정했다. 사회통합 강화 차원에서는 ①소득 불평등 완화를 위한 소득보장제도 개혁 ②공정사회를 위한 기회와 권한의 공평한 배분 ③사회통합을 위한 지역균형발전 추진이 제시됐고, 사회적 지속가능성 보장을 위해서는 ④저출산·고령사회 대비 능동적 사회시스템 구축 ⑤사회서비스의 공공성·신뢰성 강화 및 일자리 창출 ⑥일상생활의 안전 보장과 생명의 존중이 제시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회혁신 능력 배양을 위한 전략으로 ⑦인적 자본의 창의성·다양성 증진 ⑧성인기 인적역량 강화와 사람 중심의 일터 혁신 ⑨경제-일자리 선순환을 위한 고용안전망 구축이 제시됐다. 문 대통령은 3대 비전과 9대 전략을 발표하면서 “각 부처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재원 대책까지 포함해 포용국가를 위한 구체적인 중장기 로드맵을 조속히 만들어달라”고 당부했다.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국가재정전략회의와도 연계할 방침이다. 더 중요한 메시지는 국가의 존재 이유를 근본적으로 재정립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문 대통령은 이날 국가는 국민들의 삶을 총체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포용국가와 재정의 역할
▶새해 첫 출근길에 오른 시민들이 서울 광화문 네거리 일대에서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백소아 <한겨레> 기자
‘혁신적 포용국가’ 전략이 본격화되기 위해서는 경제 전략이 구체화돼야 한다. 혁신과 포용을 뒷받침하는 것은 결국 근본적으로는 경제이기 때문이다.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와 함께 정책 포용국가의 경제정책 분야를 기획하고 있는 기획재정부는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방향인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 세 축을 토대로 로드맵을 마련 중”이라고 설명했다. 정부가 출범 직후 경제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을 표방하며 내세운 소득주도 성장-혁신성장-공정경제의 삼각축은 포용국가 전략과 상통하는 면이 크다. 특히 정부는 우선적으로 재정정책의 역할 강화와 규제혁신 등 혁신 기반 조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
우리나라는 ‘나라다운 나라’의 역할을 하기에는 재정 규모 자체가 지나치게 작았다.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는 세계에서 11번째로 큰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지만, 2016년 GDP 대비 재정지출(기금을 포함한 일반정부 예산) 비중은 OECD 34개 회원국 가운데 32위(32.35%)에 그친다. OECD 회원국 평균(40.55%)을 크게 밑도는 수준이다. 한국보다 재정 규모가 작은 나라는 아일랜드(33위·27.05%)와 멕시코(34위·24.54%)뿐이다. GDP 대비 사회지출 비중은 10.1%(2015년 기준)로 OECD 평균 23.1%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유럽연합(EU)은 1960년대에, 일본은 1980년대에 이미 10%를 넘어섰다. 정부는 새해 예산안을 2018년보다 9.7%나 늘린 470조5000억 원 규모로 편성했지만 여전히 선진국 수준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다. 재정 규모가 중요한 이유는 포용적 성장의 중요한 축인 소득분배가 재정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정부는 재정의 재분배 기능을 정상화하기 위해 아동수당, 기초연금 등 각종 복지제도를 강화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근로장려금(EITC)의 대폭 확대다. 근로소득이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지급되는 근로장려금은 일하는 복지의 틀이다. 올해부터 나이 제한을 폐지하고, 소득 기준을 완화해 지급 규모가 기존 1조2000억 원 수준에서 3조8000억 원 수준으로 3배가량 늘어난다.
또 정부는 이르면 올해부터 예산안을 편성할 때 소득재분배 효과 분석 시스템을 도입해 재분배 효과가 높은 정책들에 예산 배분의 우선순위를 두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조세·재정의 재분배 효과가 선진국에 비해 아주 미미한 수준”이라며 “소득재분배 효과 분석 제도가 도입되면 재정 운용의 무게중심이 좀 더 재분배 쪽으로 옮겨갈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영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이 제도는 정부가 매년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할 때 재정 정책의 소득재분배 효과를 정책별, 제도별, 세목별로 분석한 보고서를 부속서류로 함께 제출하도록 하고 있다.
소득 분배를 강화하는 것은 단지 복지나 사회정책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국제통화기금(IMF) 등이 ‘포용적 성장’(inclusive growth)이라고 이름 붙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성장 정책이기도 하다. 소득 불평등 완화는 곧 저소득층의 소득 증대를 의미하고 이는 단기적으로는 경기 조절 기능을 하며, 중장기적으로는 수요 창출과 내수 활성화 등을 통한 경제 성장에 기여한다. 성장의 과실이 국민에게로 돌아가지 않는 경제는 지속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 470조 원 규모의 2019년 예산안 통과를 촉구하면서 “우리 경제가 이룩한 외형적 성과와 규모에도 다수 서민의 삶은 여전히 힘겹기만 한 것이 현실이고, 발전된 나라들 가운데 경제적 불평등의 정도가 가장 심한 나라가 됐다. 불평등이 그대로 불공정으로 이어졌다. 불평등과 불공정이 우리 사회의 통합을 해치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가로막기에 이르렀다”며 “우리는 경제적 불평등 격차를 줄이고 더 공정하고 통합적인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지속가능한 성장의 길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포용국가는 혁신적이어야 한다
▶성경륭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이 지난해 12월 18일 오후 서울 명동 은행회관 뱅커스클럽에서 열린 ‘제1차 포용복지포럼 : 한국사회의 소득불평등 해법 찾기’에서 포용국가와 포용성장을 주제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김정효 <한겨레>기자
정부의 ‘포용국가론’이 놓치고 있지 않는 것은 포용이 혁신과 결합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지속가능한 성장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성장의 과실이 일부 상위 계층에게 독점되는 경제가 지속가능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생산성의 향상 없이 분배만 강화되는 경제도 지속가능하지 않다. 문제는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다. 현재까지 다수의 연구들은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사물인터넷(IoT) 등 4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기술혁신이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세계 경제에 의미 있는 수준의 생산성 향상을 가져오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한다. 이는 현재까지의 기술혁신이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기에 충분한 정도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해석과 함께, 기술혁신 그 자체가 생산성 향상이란 결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란 해석이 나오고 있다.
많은 연구들은 여기서 혁신에 있어서 국가의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기술혁신을 비롯해 경제 전반의 생산성 향상으로 귀결돼온 사회적 혁신들은 시장이나 기업에 의해 자연스레 이뤄진 것이 아니라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과 역할을 필요로 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연구개발(R&D) 예산 지원이나 통신망 같은 인프라 투자 등 직접적 지원부터 규제나 제도 혁신 등을 통한 간접적인 개입까지 다각도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교육 등을 통한 인적자본의 확충은 국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아무리 혁신적인 기술이 나와도 이를 생산에 활용하거나 유통할 수 있는 교육된 사람이 없다면 보급되기 어렵다. 그 기술을 통해 만들어진 재화를 소비할 사람 역시 소득과 교육이 필요하다. 정책기획위원회는 그래서 이미 발표한 포용국가 3대 비전 중 하나로 ‘사회혁신 능력 배양’을 내세웠고, 그 구체적 전략으로 기술혁명에 대비하여 창의성, 다양성을 기르는 교육과 교육 격차 해소를 위한 정책을 제시한 것이다.
포용을 위한 변화가 혁신을 추동한 사례도 있다. 2017년 한국개발연구원(KDI)의 박윤수·박우람 연구위원이 발표한 ‘근로시간 단축이 노동생산성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를 보면, 근로시간을 줄이기 위해 2004년부터 2011년에 걸쳐 시행된 주 40시간 근무제 도입이 1인당 노동생산성을 1.5% 높이는 효과를 나타낸 것으로 분석됐다. 자료의 한계상 시간당 생산성을 분석할 수는 없었지만, 근로시간이 단축된 만큼 시간당 생산성은 더욱 크게 향상된 것으로 유추된다. 이 연구를 진행한 박윤수 연구위원은 “시장에서 경쟁이 이뤄진다면 효율화를 통한 생산성 향상은 자연스레 이뤄질 것으로 생각했지만, 실제로 시장은 그 자체로 생산성 향상을 할 수 없었고 국가 정책적으로 추진된 제도 변화가 기업들의 생산성 향상을 촉진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 역시 당장의 부작용도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혁신을 촉진하는 계기가 될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는 “우리나라의 경우 양질의 노동력을 저비용으로 사용할 수 있어 상대적으로 혁신을 덜하고도 이익을 보고 있던 상황이었다. 최저임금 인상이 되면 기업들은 혁신을 하지 않고는 살아남기 어렵게 될 것이고, 사람을 값싼 부품 취급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런데, 기술혁신이 소득분배를 악화시키거나 일자리를 감소시키는 등 혁신과 포용은 상호 모순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 많은 연구 결과를 통해 실증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혁신과 포용이 결합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조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조정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국가다. 김연명 사회수석은 “예를 들어, 위계적이고 경직적인 현재의 조직 문화에서는 절대 혁신적인 변화가 발생할 수 없다. 직장에서의 민주주의 등 정치, 사회, 문화적인 포용성이 강화돼야 경제적 혁신도 가능한데, 이건 시장에 맡겨놓는다고 자연스레 해결되지 않는다”며 “사회 전반의 포용성을 강화하기 위한 국가 전략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허승 <한겨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