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의 변호인, 대쪽 같은 비서실장, 정치 안 하겠다 했지만 정치는 운명이었다

2017.05.15 최신호 보기

문재인은 한 번도 대통령을 목표로 살지 않았다. 2012년 총선에 출마하기 전까지는 정치권 입문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정치는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그가 역사 무대에 서는 계기가 됐다.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고, 지금에 이르게 된 것도
마치 정해진 것처럼 느껴진다. 운명 같은 것이
나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어온 것 같다.”
-<문재인의 운명> 중에서

‘정치인 문재인’을 이해하려면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관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저서 <문재인의 운명>에서 “당신(노 전 대통령)은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고도 했다. 문 대통령 스스로 자신의 정치적 운명이 결국 노 전 대통령에게서 시작됐음을 인정하는 대목이다.

문 대통령의 사법연수원 시절은 평탄했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매월 봉급을 받게 돼 경제적으로도 자립할 수 있었다. 연수원의 쟁쟁한 동기들 가운데서도 문 대통령의 성적은 발군이었다. 사법연수원 수료식에서 연수원 성적 차석으로 법무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문 대통령은 판사를 지망했다. 그러나 시위 전력이 있어 임용에서 탈락하고 결국 변호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국내 최대 대형 로펌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파격적인 보수에 특전이 따르는 조건이었지만 제안을 뿌리치고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갔다. 억울한 사람을 대변하는 변호인으로 살고 싶었고, 홀로 계신 노모를 모셔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때의 귀향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운명적인 만남을 이어주는 다리가 됐다.

변호사 시절 문재인과 그의 어머니

▶ 부산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던 시절 어머니와 함께(왼쪽). 문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 사무실 간판이 함께 찍힌 사진이 온라인상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사무실은 부산 부민동 법원 앞 건물로 ‘변호사 문재인’과 ‘변호사 노무현’ 간판이 눈에 띈다(오른쪽). ⓒ뉴시스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첫 만남

노무현과 문재인. 처음에는 동업자로 만났지만 차츰 삶의 동반자로 변해갔다. ‘깨끗한 변호사’가 되기로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선후배 또는 친구처럼 함께 일하며 신뢰를 쌓아나갔다. 각종 인권, 시국, 노동 사건을 기꺼이 맡다 보니 두 사람은 자연스레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됐다. 처음부터 계획한 건 아니었다.

두 사람의 법률사무소는 부산은 물론 인근 울산·창원·거제 등을 망라하는 지역 노동인권 사건을 총괄하는 센터처럼 돼갔다. 재야운동에도 깊숙이 발을 들여놓게 됐다. 이때 문 대통령은 부산·경남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을 창립하고,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천주교인권위원회와 부산 NCC 인권위원을 맡았다. 부산 YMCA 이사와 노동자를 위한 연대 대표도 맡았다. 1985년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약칭 부민협)를 창립하고, 1987년에는 6월 항쟁의 주역이 된 부산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약칭 부산국본)를 만들어 상임집행위원을 맡았다. 문 대통령은 <문재인의 운명>에서 노무현 변호사와 함께한 6월 항쟁의 기억을 살아온 동안 가장 보람찬 일이었다고 술회했다.

참여정부(2003.2.25~2008.2.24)의 시작과 끝에는 문 대통령이 있었다. 참여정부가 출범하자 문 대통령은 민정수석 두 차례와 시민사회수석을 거쳐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재임했다.

당시 문 대통령의 청와대 생활은 누구보다도 대쪽 같았다. 고위 공직자의 관행이었던 특혜를 철저하게 내려놨다. 업무시간 외엔 직접 차를 몰았으며, 방이 따로 없는 대중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비행기나 기차는 늘 일반석을 이용했다. 노 전 대통령의 지근거리에서 국정 전반을 항상 보좌했던 1년 동안 무려 10개의 이가 빠져버렸다. 원인은 과로였다. 
 
과로로 건강이 상한 문 대통령은 민정수석을 사퇴하고 훌쩍 히말라야로 트레킹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휴식은 길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했던 것이다. 곧바로 귀국해 법적 대응 전반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탄핵 재판이 끝나고 시민사회수석으로 청와대에 복귀했다가 2005년 1월 다시 민정수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2007년 3월, 문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이 된다. 이때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장으로서 2007년 남북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성사시키기도 했다. 이와 함께 한미 FTA라는 국가 중대 협약이 체결되는 과정을 지켜보기도 했다. 국정 전반에 걸쳐 축적된 풍부한 경험은 다양한 정책 조율 감각과 국정운영에 대한 균형감을 키울 수 있는 기반이 됐다.

문 대통령의 지난 삶은 가장 정치적이었지만 가장 비정치적이었다. 정치인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정치가 올바르게 나아가야 할 길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문 대통령은 정치를 하기보다 보통시민으로서 바른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지난 삶은 ‘운명’이 돼 그를 정치판으로 불러들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의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절대 정치는 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2009년 노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는 그를 정치인의 길로 이끌었다. 사람들은 30년 동지를 잃은 아픔 속에서도 절제력과 의연함을 보여준 ‘상주 문재인’에 주목했다. 이후 노 전 대통령 추모 열기에 힘입어 친노 진영을 중심으로 ‘문재인 대망론’이 일었고, 2012년 4월 부산 사상구에서 총선에 출마해 당선 됐다. 

문재인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

▶ 문재인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 모습(왼쪽). 1980년대 한 일간지에 실린 ‘인권 변호사’ 문재인 관련기사 ⓒ뉴시스

마침내 정치 입문과 대선 도전

정치 신인이 부산에서 출마해 당선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총선 승리 두 달 후, 당시 문 의원은 마침내 18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한다. 정치 신인으로 현실 정치인이 된 지 두 달 만에 정치인 최고의 목표인 대통령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하지만 18대 대선 결과, 득표수 1469만 표, 득표율 48.02%로 아쉽게 정권교체에 실패했다. 문재인이 득표한 1400여만 표, 득표율 48%는 야권 대선후보의 역대 최고 득표수, 득표율이었다.

대선에서 패배한 후 깊은 반성과 성찰, 침잠의 시간을 보낸 문 대통령은 2013년, 저서 <1219 끝이 시작이다>를 펴내면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국가정보원 정치 개입 사건, NLL 포기 논란 등이 그를 세상 밖으로 다시 이끌었다.

2014년 12월 29일 문 대통령은 당대표 출마 선언을 했다. 당을 혁신하지 않으면 다가오는 총선은 말할 것도 없고 다음 정권교체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었다. 문재인은 당을 살리고 국민을 살리기 위해 출사표를 던졌다. 여의도 정치에 익숙한 사람들 대부분이 당대표 출마를 만류했다. 자칫 실패하면 정치적으로 사망선고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문 대통령 스스로 죽을 고비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출마 선언 시 세 번의 죽을 고비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정확하게 예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망설이지 않았다. 야권 기득권에 안주한 당을 이대로 방치한다면 누가 대선후보가 된다고 해도 정권교체를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독배가 될지 모르지만 누군가는 당을 혁신해야 했다. 정권교체에 대한 국민의 뜨거운 염원을 실천해야 한다고 믿었다.

마침내 2015년 2월 새정치민주연합의 당대표로 선출되면서 본격적인 대권 재도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과 끊임없는 싸움, 자신을 뒤흔드는 숱한 분란과 내홍 속에서도 문 대통령은 결코 타협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당 혁신에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맞섰다. 당을 흔드는 기득권의 분당과 탈당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당 혁신에 성공했다.

혁신위원회를 통해 공정한 공천 룰을 만들고, 당의 문을 활짝 열어 10만 온라인 당원을 입당시켜 당의 내실을 다졌다. 우리 사회 각계각층에서 새로운 인재를 영입해 낡은 당 문화를 젊고 역동적으로 쇄신했다. 이후 당대표를 내려놓고 백의종군으로 전국을 누벼 마침내 2016년 총선에서 제1당을 일궈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 참여정부 시절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한 문재인 대통령. ⓒ뉴시스

대통령 당선,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 선포

정치 입문 6년. 그동안 두 번의 대선 도전장을 냈다. 이번 19대 대선에 도전하면서 문 대통령은 “더 이상 운명은 없다. 숙명이다”라는 말을 되뇌었다. 대선 재수생인 그는 “지난 대선보다 훨씬 절박해졌다”면서 “나라에 큰일이 생길 때마다 ‘내가 지지 않았더라면’ 이런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고 한다. 지난 정권 시절 발생한 세월호 참사, 국정농단 사건이 대선 재도전의 확실한 명분이 됐다는 것이다.

촛불혁명, 불의에 일어선 정의로운 국민이 마침내 권력을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 정권교체, 적폐청산의 뜨거운 여망을 현실로 일구는 일은 결국 정치의 몫이다. 그는 기꺼이 국민의 촛불이 되기로 결심했다.

문 대통령은 자신을 국민의 도구로 써달라고 간청했다. 지금까지 국민을 도구로 권력을 누려왔던 특권정치를 거부하고 스스로 정권교체의 삽이 되고, 적폐청산의 벽을 깨는 망치가 되고, 정의로운 반석을 다지는 곡괭이가 되겠다는 것이다. 

또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일을 혼자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무리 좋은 선의도 혼자 하면 독선이 된다.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을 바라는 온 국민의 뜻을 모아 정의로운 통합을 만들겠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마침내 제19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걸어온 길

 

일문일답으로 본 문재인 대통령

좌우명은
‘어려울수록 원칙으로 돌아가라.’ 당장은 손해인 듯해도 결국은 더 큰 이익으로 돌아온다.

취미는
등산. 세 번의 히말라야 트레킹은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꼭 가보고 싶은 곳은
함경남도 흥남. 6·25 때 피난 나오기 전에 부모님이 사셨던 함경남도 흥남을 꼭 한 번 가보고 싶다
.
좋아하는 음식과 싫어하는 음식은
회와 해산물을 좋아하고 특별히 가리는 음식은 없다.

신체 비밀은
임플란트와 발가락. 참여정부 시절 치아가 10개나 빠져서 임플란트를 했다. 원래 이가 몇 개 남지 않아 말할 때 조금 불편하다. 그리고 발가락이 정말 못생겼다.
지난 대선과 총선 때 전국을 돌아다니느라 굳은살이 생기고 발톱이 빠져서 더 엉망이 됐다.

한 달 독서량은
예전엔 10권 정도였는데 최근엔 바빠서 2~3권.

최근에 읽은 책은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 저성장 시대, 기적의 생존 전략〉 (김현철 지음).

좋아하는 노래는
‘꿈꾸는 백마강’.

주량과 술버릇은
주량은 소주 1병이고 특별한 술버릇은 없는 편.

담배는
2004년 민정수석을 그만두고 네팔로 히말라야 트레킹을 갔을 때 끊었다.

좋아하는 한자성어는
재조산하(再造山河).
(임진왜란 당시 실의에 빠져 있던 서애 류성룡에게 충무공 이순신이 적어준 글귀로 ‘나라를 다시 만든다’는 뜻.)

자신의 외모에 점수를 준다면
대학 시절 프랑스 영화배우인 알랭 들롱을 닮았다는 얘기를 좀 들었는데 그 덕분에 소개팅에서 아내를 만났다.

한 달 용돈은
책 몇 권 사고 사람들 만날 때 밥값이나 술값을 낼 수 있는 정도.

반려동물의 이름은
풍산개는 ‘마루’와 ‘깜’, 고양이는 ‘찡찡이’와 ‘뭉치’.

가장 아끼는 물건은
법무법인 ‘부산’을 개업할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개업 선물로 보내준 괘종시계(‘증 노무현’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음).

스트레스 해소법은
산책. 밭일을 하거나 나무를 심거나 마당의 풀을 뽑는 단순노동도 한다.

가장 후회되는 일은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잘된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한 것.

타임머신을 타고 가보고 싶은 때는
선친이 살아 계셨을 때로 돌아가고 싶다. 큰아들이 고시에 합격한 모습을 봤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약속 시간에 얼마나 기다릴 수 있나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마냥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용서할 수 없는 것은
힘 있는 사람, 가진 사람, 잘나가는 사람이 약하고 없는 사람을 무시하고 깔보는 것.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다산 정약용 선생. 민본주의와 실용주의를 이끌어낸 분이다.

따르고 싶은 현대 정치인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진보적이면서도 통합적인 리더십이 존경스럽다.

가장 부러운 사람은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사람. 많은 사람에게 행복을 나눠줄 수 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연예인은
이은미, 송강호.

감명 깊게 본 영화는
‘광해, 왕이 된 남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대책 없이 울어본 것도 처음이다. 영화 곳곳에 노무현 대통령을 생각나게 하는 장면이 많아 감정 수습이 안 됐다. 백성의 삶을 외면하는 기득권 세력을 비판하고 백성을 위한 진짜 왕이 되려는 하선의 모습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박지현 | 위클리 공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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