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경관은 그곳의 역사를 말한다. 그 흔적이 사라지지 않는 한 기억은 전해진다. 기억하기 때문에 공간은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진 공장도 그렇다. 공장은 경제개발의 상징이었다. 굴뚝에서 나는 까만 매연조차 환영받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앙상한 뼈대에 으스러진 콘크리트만 남은 공장은 20세기 발전을 이끈 산업유산이라는 의미 외에는 기대할 게 없다. 자랑스러운 존재였지만 어느새 흉물로 전락한 곳. 그 공간에 새로운 존재 이유가 생겼다. 매연을 만드는 대신 문화가 자라는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 민족자본 공장 조양방직
올해 7월 새로 문을 연 조양방직은 따로 오픈식을 하지 않았지만 어느새 입소문이 나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명소가 됐다. 인천 강화군에 있는 ‘조양방직’은 일제강점기였던 1933년 강화지역 갑부 홍제묵이 만든 직물공장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민족자본으로 세운 공장이라 역사적 의미도 있다. 해방 이후까지만 해도 강화는 우리나라 직물산업을 이끌던 곳이었다. 한창 직물산업이 활발했던 때는 강화읍에만 직물공장이 60여 개, 직원은 4000명이 넘었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방직공장이 경북 구미나 대구로 옮겨가면서 공장은 가동을 멈췄다.
▶ 인천 강화군 신문리에 있는 조양방직은 1933년 설립 당시 모습을 그대로 살려놨다. 661㎡ 규모의 카페에는 크고 작은 전시품이 많아 보는 재미가 있다. ⓒ조선뉴스프레스
▶ (좌)조양방직의 위세를 보여주는 금고. 방직공장이 잘되던 시절 금고 안이 현금으로 가득했다.
(우)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조양방직 입구│조선뉴스프레스 ⓒ조선뉴스프레스
그렇게 약 30년간 폐허로 전락한 조양방직에 다시 사람이 찾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서울에서 빈티지숍 상신상회를 운영하던 이용철 대표는 우연히 이곳을 방문했다가 시간이 멈춘 공장에 흠뻑 빠지고 말았다.
조양방직은 처음 강화도에 자리 잡았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워낙 볼거리가 많아 마치 박물관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낮은 울타리 뒤로 우중충한 회색 건물 몇 개가 눈에 들어온다. 콘크리트 위에는 기와나 울퉁불퉁한 슬레이트 지붕을 얹어놓았다. 어릴 때 봤던 시골 할머니 집 느낌과 비슷하다. 공장 벽 외관에는 시커먼 그을음과 때가 묻어나 건물이 견딘 세월을 말해주는 것 같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당시 건축구조를 보여주는 지붕 모양이 그대로 남아 있다. 목재로 만든 지붕과 마루가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공간 구석구석에는 재미있는 전시품이 많다. 1980~90년대 영화에서나 볼 법한 빨간 공중전화박스, 놀이공원에서 탈출한 듯한 목마 모형, 한때 꽤나 사용했을 법한 재봉틀도 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금고다. 조양방직 금고는 우리가 일상에서 보던 것보다 수백 배쯤 크다. 2층 건물 높이로 만든 회색 콘크리트 박스 위에 부를 상징하는 누런 황소동상이 있다. 이 거대한 금고에 돈이 꽉꽉 들어찼다고 하니 당시 방직산업이 얼마나 호황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조양방직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곳은 661㎡(약 200평) 규모에 달하는 카페다. 널찍한 카페 안에도 구석구석 볼거리가 많다. 벽면에는 옛날 영사기로 흑백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건물 안쪽에는 아이들 장난감이나 놀이기구, 캐릭터 인형이 있다. 누군지 모를 인물의 아름다운 한때가 담긴 초상화와 풍경화 같은 그림이 걸려 있다. 건물 밖이 훤히 보이는 탁 트인 창가는 일찍 선점하지 않으면 앉을 수 없는 조양방직카페의 인기 좌석이다. 어둠이 내리면 커피 맛도 한층 더 깊게 느껴진다.
화학공장의 변신 코스모40
인천 가좌동에 있는 ‘코스모40’은 원래 코스모화학단지 안에 있는 공장이었다. 2016년 이 일대 공장이 대규모로 이전하면서 66,115㎡(약 2만 평) 공간에 빽빽하게 들어섰던 공장이 다 헐리고 40동 건물만 남았다. 심기보·성훈식 대표는 이 공간을 새롭게 활용할 방법을 모색하다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 인천 가좌동에 있는 화학공장 모습을 그대로 남긴 복합문화공간 코스모40(위)
코스모40에서는 전시, 공연, 플리마켓 등 다양한 이벤트가 열린다.(아래) ⓒ코스모40
두 사람은 공간의 재생을 준비하면서 무엇보다 구조를 유지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원래 있던 공장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신축건물을 옆에다 붙여놓은 것처럼 보이게 건물을 세웠다. 공장건물 기둥을 감싸는 형태로 건물을 짓자 새 건물과 공장건물의 상이한 분위기가 도드라진다. 화학공장이었던 곳은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느낌이 난다. 언더커버 조직의 배신자가 고문을 당하는 장면이나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같은 정의로운 우리 편이 빌런을 무찌르는 장소로 쓸 법한 곳이다.
코스모40은 복합문화공간이라는 이름답게 여러 가지 형태로 쓰인다. 요즘에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건물이 철거 위기에 처했을 때 사진을 찍었던 신경섭 작가의 개인전이다. 밤이 오면 공간 전체가 클럽으로 바뀐다. 화학공장에서 술 마시고 춤을 춘다니. 통행금지시간이 있었던 시절 친구들과 몰래 아지트에 모여서 노는 느낌이랑 비슷하지 않을까. 낮에는 전시, 밤에는 클럽으로 즐기는 이곳은 플리마켓이나 건축투어처럼 다양한 프로그램도 준비하고 있다.
카세트테이프 공장에서 예술학교로 팔복예술공장
한옥마을로 유명한 전북 전주에는 이제 막 관광명소로 떠오른 ‘팔복예술공장’이 있다. 전주산업단지 안 옛 쏘렉스 건물에 들어선 팔복예술공장은 원주인이 떠난 이후 25년 동안 도시의 흉물로 남아 있었다. 쏘렉스 공장은 카세트테이프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1979년 세워져 아시아 전역에 카세트테이프를 납품하던 수출기지였다. 세월이 흘러 카세트테이프의 자리를 CD가 대체하면서 공장 가동도 자연스레 중단됐다.
▶ 전북 전주시 전주산업단지 내에 있는 옛 쏘렉스 건물에 자리한 팔복예술공장에서는 다양한 문화교육 행사가 열린다. ⓒ조선DB
오랫동안 잊힌 이곳은 지난 3월 23일 개관한 이후 3만 명이 방문하면서 전성기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예술공장으로 다시 태어난 카세트테이프 공장은 젊은 작가들이 상주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문화를 향유할 기회가 부족했던 주민들에게는 예술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열리는 ‘창작예술학교’는 교육생에게 높은 만족도를 주며 순탄히 진행되고 있다. 현장에서 활동하는 예술가, 비평가, 큐레이터, 이론가 등이 예술이 가진 매체적 특색, 프로젝트 기획법, 전시 기획법 등 동시대 예술을 알려준다. 이곳에서 기획한 프로그램은 전통문화가 기반이다. 동시대 예술의 실험과 창작을 통해 예술공원, 예술공단을 만들고 더 나아가 주민과 팔복동 기업을 위한 문화플랫폼을 구축할 계획이다.
전통문화를 지키는 공간 삼례문화예술촌
▶ 우리 전통문화를 기반으로 한 문화행사가 주로 열리는 전북 완주군 삼례문화예술촌 ⓒ조선DB
전북 완주군에 있는 삼례문화예술촌은 원래 아픈 역사를 지닌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한반도에 산미증식계획을 펼치며 쌀을 수탈하는 전초기지로 사용했다. 이후 오랫동안 버려졌던 이곳은 2018년 3월 문화예술촌으로 다시 태어났다. 삼례문화예술촌의 변신은 심가영·심가희 삼례문화예술촌 대표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쌍둥이 자매인 이들은 40년 동안 세계에서 한국 무용을 알리는 중요무형문화재로 활동했다.
예술촌의 7개 양곡창고는 모모미술관, 디지털아트관, 소극장 씨어터 애니, 김상림목공소, 책공방 북 아트센터, 커뮤니티 뭉치, 문화카페 뜨레 등 다양한 문화를 누릴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개관 이후 가장 주목받는 곳은 모모미술관이다. 이곳은 전북지역 작가 초대전으로 시작해 세계적인 작가들의 초대전도 열리고 있다. 지난 10월에는 유네스코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우리 농악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제1회 대한민국 농악제’를 열기도 했다. 다양한 문화프로그램 덕분에 삼례문화예술촌은 개관한 지 9개월 만에 5만 명이 찾아온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했다.
부산의 새로운 핫플 F1963
▶ 옛 고려제강 수영공장이 F1963으로 변신했다. F1963은 부산비엔날레 특별전시관 등으로 활용되며 부산 지역 새로운 핫 플레이스로 자리매김했다. 사진은 F1963 입구(위)와 공간 내부 모습(아래) ⓒ조선DB
새로 태어난 공장을 말할 때 부산 망미동에 있는 ‘F1963’을 빼놓으면 섭섭하다. 문화창조공간으로 바뀌기 전, F1963은 고려제강이 45년간 와이어로프를 만들던 제강공장이었다. 공장이 이전하면서 고려제강과 부산시가 협업해 문화창조공간으로 만들었다. 2016년 F1963라는 새 이름을 단 고려제강 옛 수영공장은 화원, 숲, 도서관, 콘서트홀 등 다양한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곳이다. 2016년 오픈 당시 ‘부산비엔날레’ 특별전시장으로 활용되면서 관람객 17만 명이 다녀갔다.
입구로 들어서면 사시사철 푸른 대나무 이파리가 하늘 높이 뻗어 있는 정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스산한 바람이 대나무를 스치는 길을 지나 건물 외부로 발을 옮기면 수련가든이 나타난다. 수련가든은 공장이 돌아갈 당시 폐수처리장이었던 곳이다. 폐수처리장은 이제 생태정원으로 새로 태어나 악취 대신 은은한 연꽃향을 발하고 있다. 공간 안쪽은 처음 공장이 지어졌을 당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공장에서 생산한 와이어나 시설물을 그대로 둬서 마치 예술작품 안에 들어온 느낌을 준다. 공장을 지을 때 세운 벽돌기둥부터 발전기, 기름자국, 빛바랜 페인트 흔적까지. 치열했던 현장의 느낌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F1963에는 먹고 마시기 적합한 가게도 있다. 복순도가의 수제 막걸리, 체코 최초의 맥주 양조장인 프라하 브르제브노프 수도원 방식으로 만든 수제맥주 양조장, 카페 테라로사 등이 방문객에게 먹는 재미를 선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