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2년 초겨울, 신라의 김춘추는 고구려의 연개소문을 만나러 평양으로 향했다. 백제의 침공으로 위기에 몰린 신라를 고구려가 구원해주길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앞서 같은 해 8월 백제 무왕은 신라의 대야성을 함락시켰는데, 이때 대야성 성주는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이었다. 김품석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백제에 항복하려다 결국 처자를 죽이고 자결했다. 딸과 사위의 죽음을 전해 들은 김춘추는 한동안 지나가는 사람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큰 충격에 빠졌다.
▷ 삼국통일의 결정적 기반이 된나당동맹을 추진했던 김춘추.
냉정을 되찾은 김춘추는 선덕여왕에게 백제에 보복할 것을 청했고, 고구려와 군사동맹을 맺으려고 사절로서 평양을 찾아갔던 것이다. 당시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옹립한 연개소문은 고구려 최고 실력자였다. 김춘추의 제안에 연개소문은 보장왕의 입을 빌려 “고구려의 옛 땅인 죽령 이북 땅을 돌려주면 구원병을 보내겠다”고 역제안을 했다. 신라의 요청을 들어주는 대신 6세기 신라 진흥왕 때 잃어버린 한강 상류의 옛 영토를 되찾으려 한 것이다. 이에 “신하의 몸이기 때문에 영토와 같은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수 없다”고 김춘추가 한발 물러서자, 연개소문은 그를 감옥에 가두게 했다. 한편 김춘추의 처남이자 정치적 동지인 김유신은 60일이 지나도 김춘추가 돌아오지 않자 결사대 3000명을 선발해 고구려 공격을 준비했다. 일촉즉발의 긴장이 흐르는 순간, 다행스럽게도 김춘추는 고구려 탈출에 성공했다.
고구려 방문 이후 김춘추는 당나라에 주목했다. 647년 선덕여왕에 반기를 든 비담의 난을 진압하고, 김유신과 더불어 최고 실세가 된 김춘추는 당시 고구려의 최대 적국이었던 당나라와 외교를 공고히 하는 게 신라를 살리는 길이라 판단했다. 648년 당나라로 간 김춘추는 나당동맹을 맺고 당 태종에게서 군사 파견을 약속받았다. 국경을 맞댄 고구려와 늘 긴장관계였던 당나라 입장에서도 신라의 협력은 필요했다. 김춘추는 진덕여왕에게 중국식 의관을 착용할 것을 건의하면서 당나라와 우호 협력 기반을 다져나갔다.
654년 진덕여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김춘추는 나당동맹을 더욱 굳건히 했고, 마침내 660년 당나라 고종은 13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정벌했다. 660년의 백제 멸망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는 데 초석이 된 사건이었다. 그러나 김춘추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보지 못하고 661년 사망했고 그의 유지(遺志)는 아들 법민, 즉 문무왕이 잇게 된다. 668년 문무왕은 김유신과 소정방을 중심으로 한 나당연합군의 힘으로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당나라 군대까지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한반도에 대한 지배 야욕을 보이던 당나라를 물리치고 676년엔 완전한 삼국통일을 완수했다.
김춘추와 연개소문의 만남은 신라와 고구려의 동맹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는 것으로 선회하는 계기가 됐다. 나당동맹은 삼국 중 가장 후발주자였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결정적 기반이 됐다. 혈혈단신으로 적국의 최고 지도자를 만나 외교적 교섭을 시도했던 김춘추의 노력이 역사적 평가를 받는 이유다.
글 ·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20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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