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시 노성면의 중심가에서 샛길로 빠져든다. 완연한 봄날, 너른 들녘은 한 해의 채비를 서두른다. 마른 땅은 뒤집어져 속살을 드러내고 흙은 제 몸의 양분을 나누어 생명을 키워낸다.
그럴수록 농부의 손길은 분주하다. 하지만 길목의 행자는 딴청이다. 도심을 떠난 일탈의 자유다. 따스한 햇살도, 느린 바람도 고루 누리며 걷는다. 세상의 시름일랑 절로 뒷전이다. 먼발치 노성산에 눈을 두고 걸음을 아껴 딛는다.
첫 멈춤은 길가의 정려각이다. 정려는 효자나 열녀, 충신 등을 기리는 자취다. 명재고택 초입의 정려각은 명재(明齋) 윤증(1629~1714)의 모친 공주 이씨를 기린다. 그녀는 병자호란 때 정조를 지키기 위해 자결했다. 윤증은 백의정승이라 불린다. 학문이 높고 청렴한 학자였다. 숙종은 한 차례도 벼슬을 한 적이 없는 그에게 우의정을 내렸다. 그는 “어머니 한 분도 지키지 못한 주제에 어떻게 나라를 지키겠는가”라며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마을을 향해 열려 있는 사랑채엔 낯선 해방감
정려각을 지나 안산에 해당하는 작은 소나무 언덕을 끼고 돈다.
비로소 명재고택이 모습을 드러낸다. 고택은 지난 1709년에 지어졌다. 윤증 선생의 둘째 아들과 제자들이 초가에서 지내던 윤증선생을 위해 지었다. 여느 사대부 가옥과 달리 솟을대문이나 울타리가 없다. 바깥과의 경계도 구분 짓지 않는다. 사랑채는 곧장 마을을 향해 열려 있다.
그럴 만한 연유가 있다. 명재는 소론의 영수였다. 그의 스승인 송시열의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던 시절이었다. 노성향교는 원래 지금의 노성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는데 당시 명재고택 곁으로 옮겨왔다. 명재를 감시하고자 하던 의도가 다분하다. 그러자 대문과 담장을 없앴다. 거리낌 없이 드러내므로 세상과 마주했다. 덕분에 명재고택은 시원스러운 개방감을 자랑한다.
서쪽에는 노성향교가 있고 동쪽은 사당을 지나 장독대 끝자락의 도서관, 노서서재다. 고택은 그 가운데서 주변을 아우른다.
노성산 아래 모두가 하나의 집인 양 어우러진다. 수평의 건물은 바깥으로 담을 두르지 않아 훨씬 너그럽다. 그 풍모만으로 마음 한쪽의 여유로움을 선사한다.
대문 없는 마당을 가로질러 본채와 마주한다. 윤증 선생에게 성리학은 단순한 학문을 넘어 삶의 근간을 이루는 실천의 철학이다. 고택도 사람을 닮았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은 아니다. 안채와 사랑채가 나눠지고 사당을 갖춘 구조 또한 조선 중기 성리학의 규범이다. 무엇보다 윤증의 명성에 비하면 검소하고 청빈한 생김이다.
바깥 담이 없다 보니 마당을 지나 곧장 사랑채에 다다른다.
팔작지붕을 인 정면 4칸, 측면 2칸의 구조는 당당하게 집 앞쪽으로 돌출했다. 이중의 기단 위에 자리해 특유의 존재감을 뽐내지만 고압적이지 않다. 수평으로 길게 이어진 행랑채와 등을 맞댄다.
‘도원인가’ 편액처럼 창밖은 한편의 파노라마
외부와 접한 사랑채는 큰 사랑방과 좌우의 마루로 이뤄진다. 서쪽은 누마루고 동쪽은 대청마루다. 안으로는 사랑채의 큰방과 작은방이 미로처럼 차례로 나온다. 할아버지에서 손자까지 3대의 방이다. 끝자락의 작은 사랑방은 행랑채의 일부다. 안채로도 문을 연다. 그러므로 사랑채와 안채는 떨어져 있지만 연결되고 공간의 연속성이 생겨난다.
큰방과 작은방 사이의 문도 눈여겨볼 만하다. 미닫이와 여닫이 겸용이다. 평상시에는 여닫아 사용하는 문이지만 큰 상이 들어오거나 할 때는 미닫이로의 기능도 한다. 여닫이문을 좌우로 밀어 문틀과 짝을 맞추면 그때부터는 밀고 닫을 수 있는 미닫이문이다. 다른 가옥에서는 좀체 볼 수 없는 독창성이다. 그럼에도 사랑채의 진정한 매력은 마당과 접한 누마루다.
한옥은 그 품 안에 머물 때 진짜 값어치가 드러난다. 사랑채 누마루의 들창을 열자 그 말이 이해가 간다. 와이드스크린의 절묘한 화각이다. 남쪽으로 난 창으로는 교촌리 일대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계룡산 암봉도 품는다. 서쪽 창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꽉 들어찬다. 마당과 연못의 전경도 눈에 든다. 남향의 수혜도 더한다. 열린 창으로 깊숙이 스미는 오월의 햇살이다. 창가에 팔을 걸치면 이번에는 아래쪽 기단 위에 석가산(石假山)이다. 뾰족한 돌들이 금강산을 연출한다. 하늘에서 지상을 내려다본 신선이 된 듯하다. 그래서일까.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면 좀체 일어설 수가 없다. ‘도원인가(桃源人家)’라는 편액이 괜스럽지 않다.
누마루는 행랑채를 따라 안채의 대문과도 이어진다. 행랑채는 서쪽 두번째 칸이 안채의 대문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일단 벽이 막아선다. 벽은 발아래 개구부가 뚫렸다. 내외벽이다. 안채는 여인들의 영역이다. 그 부분으로 방문객을 확인한 후에야 안으로 들였다. 안채는 ‘ㄷ’자 형이다. 행랑채와 어울려 ‘ㅁ’자를 이룬다. 서쪽으로는 곳간이 위치하고 동쪽에는 며느리의 거처인 건넌방이다.
400년 된 정자목 아래 수백 개 장독대 장관
안채는 우선 너른 마루가 눈에 띈다. 여덟 칸의 마루는 고택의 규모나 마당에 비해 넓다. 반자를 들지 않으니 대들보와 서까래가 두드러진다. 기둥이 높지 않아 수평으로 평온하다. 북쪽으로 난 바라지창은 그 방점이다. 창문을 닫으면 말의 형상을 닮은 옹이의 무늬가 좌우 대칭을 이룬다. 창문을 열면 뒤뜰이다. 대숲 아래 장독대가 눈을 맞춘다. 마음은 경계를 풀고 시간은 흐름을 잃는다. 오롯한 고요만이 가득하다. 그 품에서 또 한참을 머물 수밖에 없다.
명재고택의 매혹이 옛 한옥의 정취이기만 할까. 경계를 지우므로 주변과 어우러져 사방으로 펼쳐진다. 걸음이 닿는 외부의 공간은 한층 여유로운 쉼터다. 굳이 이름 붙여 찾을 ‘힐링 캠프’가 따로 있을까. 안채의 대문 바깥은 대로와 접한 연못이다. 숙박을 위해 지어진 초가의 곁이다. 명재고택에 속하지만 서쪽으로는 노성향교와 이웃한다. 연못은 우리 전통 방식의 방지원도(方池圓島)다. 네모난 연못 가운데 둥근 섬을 조성했다. 섬으로 들어가는 길은 북쪽에 있다. 명재고택에서 이어지는 동선이다.
연못의 둘레를 느릿하게 산책하다 섬 안으로 걸음을 뗀다. 연못의 품에서 연못을 응시한다. 길가로는 벚나무 몇 그루를 심었는데 이른 봄에는 벚꽃의 반영이 아름답다. 섬 안에는 배롱나무가 사방으로 그늘을 드린다. 유월 지나서는 선비의 꽃이라는 백일홍을 피운다.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으니 의자 위에 가만히 앉아 물아일체(物我一體)를 누린다.
비릿한 물내음이 끼친다. 나무의 물그림자가 하늘댄다. 마치 연못의 일부가 되고 섬의 일부가 된 것만 같다. 누마루에서 누린 심상은 자연의 풍광 속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연못 위에 이른다.
그 정점은 동편 언덕의 고목 아래다. 400년 수령의 정자목을 비롯해 서너 그루의 느티나무가 고혹이다. 명재고택의 동쪽은 수백 개의 장독대가 장관을 이룬다. 교동 전독 장이라 부르는 300년 씨장의 터다. 집안의 대를 이은 것이 사내의 소임이기만 할까. 그 안에 세대를 이어온 여인네들의 신산스러운 삶이 장맛으로 삭혀져 익어간다.
언덕배기 푸른 고목이 위로 가지를 내려 위로한다. 그 그늘에는 너른 평상을 두었다. 명재고택을 찾는 이들은 누구나 그 위에서 쉬어 간다. 발아래는 고택의 전경이다. 사랑채의 동면과 사당채의 전면이 눈을 맞춘다. 300년을 살아낸 사람들의 자취를 한걸음 떨어져 물끄러미 내려본다. 아들에게서 아들에게로, 다시 딸에게서 딸에게로 이어지는 산 자와 죽은 자의 무수한 사연이 깃들었겠다. 집은 묵묵하게 품에 안고 모두를 지켜보고 있었으려나. 그러므로 고택의 여행은 시간을 거슬러 원류를 찾아가는 과정이려나. 고목이 다시 가지를 흔든다. 바람이 분다는 뜻이렷다. 괜한 사념일랑 내려놓으라는 손짓이렷다.
고택보다 오래 살아 그 생과 사를 모두 마주한 나무 아래에서 그저 멍하니 시선을 방목한다. 시선뿐이랴. 마음의 온갖 잡념도 하나 둘 세상으로 흘려보낸다. 비워내므로 마음에 찬다. 맑고 명료한 기운이다. 욕심내지 않아도 마음에 넘치는 풍요다. 사랑채의 누마루와 안채의 대청마루에서, 또 연못의 섬 위에서 한 번 더, 그리고 마지막 발길이 다다른 고택보다 늙은 정자목 아래에서 간신히, 어질러진 마음을 추슬러 살아낼 힘을 얻는다.
글과 사진·박상준(여행작가)